▲강정식
시인, 전 홍천예총 회장, 국가기록원민간위원

산에는 진달래가 피고 냇가에는 버들강아지가 뽀얀 등을 보인다. 한겨울을 이겨낸 대지는 이제 봄기운에 휩싸였다. 노란 개나리가 꽃잎을 피우고 자두나무 앵두 고야나무들도 이에 질세라 곧 꽃망울을 터뜨릴 것이다.

지난달 3월은 미세먼지와 황사로 맑은 날이 별로 없었다. 근대의 우리나라는 역사적으로 볼 때 1960년 3월은 부정선거로 얼룩진 달이다. 자유당에서 저지른 부정선거는 곧이어 4.19혁명으로 이어졌다. 4.19혁명은 우리 홍천지역과도 무관하지 않다.

지금으로부터 60년 전 4월 전국의 중고등학교와 대학생들이 부정선거 규탄 데모가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고등학교 데모가 최초로 일어난 곳이 대구의 대구공고이고 그 다음이 마산상고 부산상고 이어서 서울의 성남고등학교이다. 그리고 다섯 번째로 홍천농고와 홍천여자중고등학교였다. 홍천에서는 금강운수 버스 10대를 동원해 300여 명의 학생이 서울로 향했다.

학생들이 망우리고개를 넘었을 때 1차 제지를 받았고 다시 제기동 휘경동을 지날 때 경찰과 서울의 자유당 별동대인 폭력배들로부터 육탄제지를 받았으나 이때 고려대와 연세대 학생들이 합류해 경찰과 폭력배(깡패라 불렸다)들을 물리치고 홍천의 학생들은 귀가를 했다. 홍천지역이 정치에 참여한 최초의 사건이었다. 이러한 내용은 홍천군지에도 기록돼야 하는데 누군가가 기록해주는 사람이 없어 안타까울 뿐이다. 

냇가의 물은 더욱 맑게 흐르고 묵밭에는 달래와 쑥 고들빼기가 새파랗게 나오고 있다. 밤과 낮의 길이가 똑같은 춘분이 3월에 지나고 보니 한 달 새 낮이 퍽이나 길어진 것처럼 느껴진다. 지난겨울은 눈도 많이 오지 않고 그리 춥지도 않아 봄을 일찍 맞는 기분으로 4월을 맞았다.T.S 엘리엇 시인은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했다. 왜 그랬는지는 몰라도 그런 말이 왜 유럽의 옛 시인의 시에서 나왔을까 생각해본다.

사실 우리나라야 말로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이야 뭐니 뭐니 해도 배고픔이 없으니 말이지 배고픈 것만큼 서러운 게 없을 때 우리의 어버이들은 4월만 되면 식량이 떨어져 배를 굶고 살았다. 불과 6~70년 전 얘기를 하면 요즘 사람들은 “왜 그때 얘기를 하느냐”고 반문하겠지만 그 시절을 겪은 필자는 봄날의 서러움을 직접 당해본 당사자의 한사람이다.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한다”라는 말처럼 사람들은 조금만 편해지고 부유해지면 옛 것은 잊고 마는 속성이 있다. 특히 우리민족은 사회학적으로 더욱 그렇다고 한다. 한국의 6천년 역사 중 농업국에서 불과 반백년이 지난 뒤 우리는 세계에서도 잘사는 나라에 속한다. 요즘 뱃속이 편하니까 과거사가 어떻고 적폐청산이고 독재시절이고 하지만 광복 직후 혼란기의 나라정세 때 5.16정변 후 국가가 주도해 “우리도 한 번 잘살아보자”하는 구호아래 이 정도의 나라가 된 것이다.

보릿고개란 말은 5~6월에 보리가 패서 수확할 때까지 먹을 게 제일 없을 때를 말한다. 그 당시에는 심지어 보리가 덜 여물었는데도 먹을 게 없어 보리이삭을 가위로 잘라 가마솥에 넣고 볶아서 보리쌀을 만들어 연명을 할 때였다. 보릿고개 없어진지가 이제 겨우 60여 년 밖에 안 된다. 이런 얘기를 젊은이들에게 하면 “꼰대들이 왜 호랑이 담배 먹던 얘기를 하느냐”고 하겠지만 알 것은 알아야 할 것이다.

봄은 세월을 따지지 않는다. 10년 전이나 100년 전이나 봄은 봄이다. 들과 산은 꽃으로 뒤덮이고 만물이 생동감을 느끼는 계절이다. 봄에 씨앗을 뿌리지 않으면 가을에 거둘 게 없다. 땅에는 씨앗을 뿌리고 우리네 사람에게는 희망과 용기 삶의 새 맛을 듬뿍 받는 계절이 됐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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