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식
시인, 홍천문화원 부원장, 국가기록원민간위원

우리 며느리는 요즘말로 신식며느리다. 우리 집에 온지 13년차에 손자 형제를 뒀다. 대학교 졸업하고 취업(대한항공 승무원)해서 5년여 넘게 주로 국제선을 타다가 아들을 만나 결혼을 했다. 아들이 전문의(정형외과)를 따고 대형 병원에 있을 때 학회세미나에서 의대 동기인 큰처남을 만나고 거기서부터 인연이 됐다.

몇 년 만에 만난 동기생들이 모여 이런저런 얘기 끝에 한 친구가 “승일아 너 장가 안 가니?” 하자 아들이 “여자가 없어 못 간다. 왜?” “얘 여동생 있지 않니?” “그 꼬맹이?” “꼬맹이가 뭐야. 숙녀인데.” “지금 뭐하는데?” “비행기 타지. 승무원이야” 해서 인연이 여기서부터 시작됐다. 

꼬맹이란 아들이 의대 다니고 며느리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였다. 하긴 일곱 살 차이로 대학생과 초등학생이니까 오빠 친구들이 꼬맹이라고도 부를 수 있다. 그렇게 얘기가 있은 후로 두 달 만에 결혼식을 올렸다. 아들이 서른여섯 며느리가 스물여덟로 여덟 살의 나이 차이다.  

며느리는 운수업(택시회사)을 하시던 부모와 위로 오빠가 둘이 있는 막내다. 외동딸인 셈이다. 큰오빠는 아들과 같이 중앙대 의대 전문의 동기이고(후에 성형외가 개업) 작은오빠는 경찰대를 졸업하고 경정으로 있다가 적성에 안 맞는다고 사표를 내고 연세대 치의예과에 다시 들어가 졸업 후 그곳에서 치대 교수를 하며 치과의사로 있다. 

며느리는 성신여대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고 바로 대한항공에 입사해 국제선에서 만4년을 근무하고 결혼과 동시에 퇴사했다. 원래 처가는 경상북도 청송인으로 수십 년 전 서울로 이주해 살았다 한다. 항공사에서는 결혼하고도 본인이 원하면 1년쯤 휴직했다가 다시 복직할 수 있다고 하나 며느리는 전업주부로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결혼 직후 경기도 안산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했고 아들의 직장은 지금과 같이 경기도 시흥시 시화병원 관절센터 정형외과였다. 결혼 2년차에 맏손자를 보고 2년 터울로 둘째 손자를 봤다. 아내의 말로는 딸 하나쯤 더 낳았으면 했는데 아들일까봐 안 낳았다는 며느리의 얘기였다고 한다. 

자식자랑(며느리 포함)은 팔불출이라고 했는데 팔불출이 돼도 자랑할 일은 자랑해야 하겠다. 며느리는 우선 착하다. 현모양처다. 남편한테도 잘 하거니와 애들한테도 지극정성이다. 물론 부모인 우리도 참으로 잘 챙긴다. 

특히 아내가 와병 중일 때 병원에 장기 입원한 적이 있었다. 그때 며느리가 “어머님 잡수시고 싶은 것 있으면 말씀하세요” 했더니 아내가 “된장찌개가 먹고 싶다”고 했다. 며느리는 그때까지 시어머니의 독특한 된장찌개 비법을 모르고 있던 차에 주문을 받고 많은 고심을 했다고 한다. 그 후 비법을 배워서 요즘도 집에 오면 구수하고 오묘한 맛을 내는 된장찌개를 끓여놓고 간다. 한 번에 나 혼자 일주일쯤 먹을 양이다.

뿐만 아니라 명절이나 기제사 때 탕국도 잘 끓인다. 이번 추석에도 아들은 국물 맛을 내고 며느리는 간을 맞추고 해서 맛있는 탕을 제사상에 올렸다. 문제는 너무 많이 해놔서 나 혼자 일주일쯤은 족히 먹을 양이다.

10여 년 전 집사람이 병원에 있을 당시 늘 병원 밥만 먹다가 막장과 된장을 적당히 섞고 풋고추와 마늘 등 갖은 양념을 넣은 후 약한 불에서 볶아 만든 된장찌개를 새로 이름 지어 ‘순예표막된장볶음’이라고 칭하여야 하겠다. 입맛이 없을 때 고인이 된 아내의 입맛을 저 세상에서나마 신식며느리의 음식솜씨를 뽐내게 해주려 한다. 필자 또한 며느리가 정성들여 만든 된장국과 탕국 생선알탕찌개를 잘 먹고 건강을 유지해야 자손에게 짐이 덜 되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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