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향 머금은 번안시조 [2-106]

길을 걷다가 날이 저물어 주막집 신세를 지는 경우가 빈번했다. 괴나리봇짐을 풀고 눈을 붙이는 둥 마는 둥 하다가 첫닭이 울기가 바쁘게 발길을 재촉했던 것이 우리 선현 및 선비들의 삶과 여정이었다. 이런 시간적 및 공간적인 차이 때문에 삶의 질은 어려울 밖에 없었으리라. 새우잠을 자는 둥 마는 둥 하다가 비로소 닭이 울어 앞길을 물어가면서 다시 걸어가려니 가랑잎 가랑잎만 무심하게 날리면서 다가온다고 읊었던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

途中(도중) / 석주 권필
날 저물어 들에는 외로운 주막집에
산 깊어 사립문은 닫지도 아니하고
닭 울어 물어 가려니 가랑잎만 날리네.
日入投孤店      山深不掩扉
일입투고점      산심부엄비
鷄鳴問前路      黃葉向人飛
계명문전로      황엽향인비

가랑잎 가랑잎만 무심하게 날리면서 다가온다네(途中)로 제목을 붙여본 오언절구다. 작가는 석주(石洲) 권필(權韠:1569~1612)이다. 위 한시 원문을 의역하면 [길을 가다가 날 저물어 들린 외딴 주막집에는 / 산이 깊어 사립문은 닫지도 않고 살고 있네 // 닭이 울어 앞길을 물어가면서 다시 걸어가려니 / 가랑잎 가랑잎만 무심하게 날리면서 다가온다네]라는 시심이다.

위 시제는 [길을 걷다가]로 번역된다. 먼 길을 걷다가 날이 저물면 주막집에서 하룻저녁 신세를 졌다. 오늘날의 여관이나 모텔과 비교하는 것은 상상일 뿐이다. 창호지를 바른 봉창문에 구멍이 나고 문고리도 없는 방인지라 특실이 따로 있을 리 없다. 몇 사람씩 서로 엉켜서 새우잠으로 저녁을 지새울 것이란 상상을 한다면 그 때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겠다.

시인은 이런 시대적인 상황에서 살았고, 위치가 고관대작에 미치지 못했음이 분명한 처지임을 상상하게 된다. 날이 저물어 들러서 하룻저녁을 지낼 외딴 주막집은 산이 깊어 사립문이 없어 닫지도 않았다는 당시의 상황을 그대로 대비해 보인다. 허름하기 그지없는 주막집임을 알 수 있는 시상적인 그림 한 폭이다.

이런 허수름한 주막이지만 화자는 첫닭이 울자 괴나리봇짐을 다시 짊어지고 머나먼 여정을 다시 시작해야 될 판이다. 아직은 컴컴한 밤이지만 첫닭이 울어 앞길을 물어 다시 길을 재촉해 가려니 길가에 나뒹굴고 잇는 가랑잎 가랑잎만 날리면서 가는 길을 안내하고 있다는 시적인 상상력을 했다. 짤막한 절구에서도 대비법의 상상을 만나게 된다.

위 감상적 평설에서 보였던 시상은 ‘날 저물어 주막집에 사립문도 닫지 않고, 닭이 울어 다시 가니 가랑잎만 날렸으니’라는 시인의 상상력을 통해서 요약문을 유추한다. 작가는 석주(石洲) 권필(權韠:1569∼1612)로 조선 중기의 시인이다. 의지가 강하여 부귀, 영리, 번화, 미련을 일체 마음속에 두지 않았던 인물로 알려진다. 벼슬하지 않은 채 야인으로 일생을 마쳤다. 술로 낙을 삼았는데 부인이 금주를 권하니 시 <관금독작>을 지었다고도 전한다.

【한자와 어구】
日入: 해가 들다. 날이 저물다. 投: 투숙하다. 孤店: 외딴 주막집. 山深: 산이 깊다. 不掩: (문을) 닫지 않다. 扉: 사립문. // 鷄鳴: 닭이 (새벽을 알려) 울다. 問: 묻다. 前路: 앞 도로. 黃葉: 가랑잎. 向: 향하다. 곧 날려 향하다. 人飛: 사람 쪽으로 (향하여) 오다.

장희구 張喜久(문학박사 / 문학평론가·시조시인)
아호 : 瑞雲·黎明·友堂
한국문인협회 회원 / 한국시조협회 부이사장
(전)한국시조사랑시인협회 국제교류연구소장
조선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문학박사)
남부대학교·북경경무직업대학 교수 역임
조선대·서울교대·공주교대·광주교대 外 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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