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식
시인, 홍천문화원 부원장, 국가기록원민간위원

전 호에서 결초보은에 대한 고사성어 유래를 썼다. 이번에도 그와 비슷하나 보은은 같고 결초가 아닌 내용이다. 보은에 대한 옛 얘기이긴 하나 모 집안에서 내려오는 실화라는 얘기도 있으나 역사적으로 증명된 것은 아니고 다만 “삼국유사”처럼 역사성 얘기로 치면 적당할 것 같다.

조선 선조 때 우리나라의 역관(통역관) 한 분이 조정의 사신을 따라 중국(명나라)에 갔다. 낮에는 공무(통역)로 밤에는 숙소를 벗어나 일행 역관 몇몇이 유흥가를 탐방하다 어느 주점 앞에 섰다. 그 주점 대문 앞에는 “저희 집에서 하루 쉬시면 만 냥입니다.” 이웃집들의 가격표는 보통 몇 냥 또는 많아야 몇 십 냥인데 만 냥이면 보통 주점들의 천배나 되는 최고가의 돈을 요구했다.

일행 중 홍 씨 성을 가진 역관은 호기심에 여비를 전부 털어 그 집에 들어갔다. 주점 주인은 만 냥의 술값은 자기네가 정한 게 아니고 한 귀한 여인네가 집안을 살리고자 정한 것이며 손님들이 원한다면 면담은 시켜드리겠지만 성사여부는 모르겠노라고 했다.

홍 역관과 일행은 술값을 선불로 내고 그 여인을 불렀다. 귀티가 나는 여인은 옷을 곱게 차려 입고 가련한 모습으로 술 접대와 하룻밤을 모시겠다고 했다. 이때 수석 역관인 홍 역관이 동료 역관들과 눈 대화로 술 한 잔씩만 먹고 뜨기로 했다. 역관들이 이심전심으로 뜻이 통한 것이다. 술좌석을 뜨자 여인네는 몹시 당황하며 혹여나 본인이 큰 실수를 해서 그런가보다 하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때 홍 역관은 “보아하니 말 못할 사연이 있어 이런 곳에 나온듯한데 우린 대접 잘받고 기분 좋게 갑니다” 하니 여인이 함자라도 알려달라고 했으나 거절했다. 다만 역관 중 한사람이 “우린 저 동쪽 조선이란 나라에서 온 역관이고 술값을 낸 저 사람은 홍 역관이오”하며 자리를 떴다.

중국 사신 일을 잘 마치고 일행들은 귀국을 했고 그 후 수십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후 홍 역관은 경제범죄에 역류돼 옥사 직전(지금의 무기징역)의 상황이고 국내는 임진왜란이 나서 온 나라가 불바다가 됐다. 나라에서는 급히 중국의 원병을 받아야 하는데 유능한 역관이 필요했다. 이 때 마침 홍 역관이 모함에서 풀려나 백의종군 신분으로 명나라 원병 요청의 일원이 됐다. 유능한 통역으로 이여송이 이끄는 명나라 원병이 와서 조선 군인들과 합류가 됐다. 

그 후에도 나라는 편치 않아 당쟁이 심했고 정유재란도 일어났다. 선조임금은 당시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가 고려 말 그 가문이 중국계 집안에 이름이 올라 있는 것이 나라의 수치라고 해서 늘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다. 선조는 양대 왜란도 끝나고 명나라는 쇠락의 길을 걷고 청나라가 부흥하고 있는 시점에 태조(이성계)의 가문 신분을 정리하고자 중국에 사신을 보내기로 했다.

사신을 정하고 역관으로 홍 역관을 뽑았는데 그는 아직 죄인 신분이고 비록 왜전 때 명군을 불러오는데 공헌을 했으나 면책된 것은 아니어서 고심 끝에 조건부로 역관에 명했다. 즉 모든 죄를 사하고 벌금도 면죄할 테니 중국에 통역관으로 가서 일을 성사시키라는 왕의 특명이었다.

일행이 중국에 도착해 숙소에 묵고 있는데 중국 고급관리가 한국일행을 만나 혹 홍 씨 성을 가진 역관을 찾으며 중국 정부에 황제 다음가는 최고위급 관리가 찾는다고 했다. 홍 역관이 그 관리가 찾는 연유를 묻자 고위관리는 대답 대신 한 여인을 소개했다.

여인과 그 최고관리는 홍 역관에게 큰 절을 하며 “지금까지 수십 년 동안 아버님을 기다렸습니다”라고 했다. 여인은 수십 년 전 주점에서 만난 그 여인이었다. 홍 역관이 준 만 냥으로 옥에 갇힌 아버지를 구했으니 홍 역관이 아버지와 같다며 융숭한 대접을 하면서 부탁할 것이 없느냐고 했다. 홍 역관은 당연히 중국에 온 목적을 얘기하고 고관은 바로 그 사항을 고쳤다고 한다. 비록 옛 얘기지만 현재에도 귀감이 되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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