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식
시인, 홍천문화원 부원장, 국가기록원민간위원

세계적 무용가 최승희(1911~1969)는 홍천군 남면 제곡리 출신이다. 지금도 그 생가 터가 있다. 출생해 10살 가까이 이곳에서 살다가 서울 종로 외가댁에서 살았고 그곳에서 학교를 다녔다고 한다. 최승희의 출생에 대해서는 20여년까지도 불확실했다. 그에 대한 호적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종로에서 태어나 홍천의 최씨 가문에 일시 와 있었다는 얘기(구두)도 있고 그 반대로 홍천에서 태어나 살다가 서울 종로 외가댁에 갔다는 설도 있다.

해서 2007년 당시 문화원장(김상옥)과 임원진이 무용가 최승희  출생지 확인을 위해 중앙대 교수(최승희 관련 전문가)를 초빙해 그에 대한 모든 면에 대해 세미나를 개최하고 최승희가 홍천 남면 제곡리에서 태어났다는 확인을 했다. 그 이후부터 홍천 출신이 재확인된 셈이다.

제곡리는 어떤 곳인가 산과 물과 들이 어우러진 경관이 뛰어난 작은 마을이다. 최승희가 어릴 때(6~7세) 동네 옻샘물가 너래바위에서 바가지를 머리에 이고 춤을 췄다는 바위가 아직도 있다. 샘물은 사용을 안 해서 폐쇄 직전에 있다. 이곳은 최씨 가문의 집성촌이다.

10여 년 전 최승희 무용제가 창립되어 활발히 진행되는가 싶더니 뜻하지 않게 광복회가 중심이 된 반 최승희 운동으로 잠정 취소됐다. 필자는 50여 년 전 이곳에 출장을 갔다가 당시 이장(최씨) 집에서 1박을 하면서 최승희에 대한 많은 얘기를 들었다. 그는 친일파도 아니고 공산주의자도 아니다. 다만 그 시대가 그러했고 동시대에 살았던 인물이기에 종북친일의 대명사가 붙어 있을 뿐이다.

그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무용가다. 한류의 원조다. 일제강점기 그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프랑스 미국 러시아 독일 중국 등 한국무용을 세계에 과시했다. 그는 시각에 따라 좌파 친일가담이 맞다. 그러나 그 당시 세계적인 예술가(문인 포함)인 까뮈 피카소 등도 한때 공산주의자들이었다. 친일 행적도 그렇다. 우리가 36년간 나라 잃고 일제강점기 속에 살았기에 그 행적여하에 따라 친일 반일의 등급이 있었을 뿐이다.

한류는 세계로 더 나가야 한다. 여기서 멈출 수는 없다. 최승희에 대한 순수 예술성만 보고 홍천을 세계적인 무용가 탄생지로 새롭게 조명해야 한다.

동양의 진주 세계의 무희
- 최승희 추모제에 부쳐 -

어릴 적 재질이 꽃피던
여기 제곡리 옻샘물 터에는
이른 봄에는 나비가 모여 춤추고 
초가을 화창한 날에는
잠자리가 춤을 추었네

나라를 잃은 어둡던 시절
타고난 재주와 피나는 연습으로 
온 세계에 춤으로 이름을 떨쳤네

한국과 서양무용을 익히고
고전과 현대 춤을 같이 추며
중국 경극의 기초를 다듬고
보살 춤 같은 창작품도 선보여
농익은 춤의 극치를 이뤘네

한국은 물론 아시아도 좁다고
세계의 무대에서 춤의 세계를 활짝 편
그 춤사위 한 시대의 빛나는 별이여

옻샘물 가에서 대여섯 살 때
칡덩굴 잎 따 들고
바가지 머리에 이고

동네 아낙네 앞에서
춤추어 보이던 그대의 몸짓이
세계 무용계를 휘어잡은
인간이 표현할 수 있는
율동의 극치였네

한때는 시대의 어려움 속에
고난의 시절도 있었지만
이제 그 낡은 이념의 뿌리는 뽑혔으니
오직 춤의 화신으로 한민족 앞에 우뚝 선
그대는 세계의 무희였으니
이곳 고향산천에서 영원히
부활의 춤을 너울너울
마음껏 추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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