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향 머금은 번안시조 [2-98]

일 년 내내 힘들게 농사짓는 일은 가을의 풍성한 수확을 맛보기 위함이다. 누렇게 익은 곡식을 바라보는 농부의 마음은 흡족하기 그지없다. 덩그렇게 달린 호박과 박을 보면 두우웅실 먹지 않아도 배가 고프지 않다. 알알이 여물어 빨갛게 익은 고추를 따다가 손자 고추 보았다는 소식을 들으면 ‘금줄’을 칠 준비하기에 바쁘다. 문 앞에는 누렇게 벼가 익어 마침 먹을 만하고, 집 뒤에는 이미 목화가 피어있어 입을 만하다고 읊었던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

野興(야흥) / 태촌 고상안
문 앞에 벼 익어 집 뒤에 목화 피고
낮잠 자니 탑상에 산들 바람 부는데
아이는 고기 잡아서 돌아왔다 알리네.
門前稻熟堪爲飯    舍後綿開可作衣
문전도숙감위반    사후면개가작의
午睡正甘風榻上    兒童忽報打魚歸
오수정감풍탑상    아동홀보타어귀

낮잠 한 숨 잤더니 탑상에 산들바람이 불어오고(野興)로 제목을 붙여본 칠언절구다. 작자는 태촌(泰村) 고상안(高尙顔:1553~1623)이다. 위 한시 원문을 의역하면 [문 앞에는 누렇게 벼가 익어 마침 먹을 만하고 / 집 뒤에는 목화가 피어있어 입을 만하네 // 낮잠 한 숨 잤더니 탑상에 산들바람이 불어오고 / 아이는 고기잡이 갔다가 돌아왔다고 급히 알린다]라는 시심이다.

위 시제는 [가을 들판에 무럭무럭 익어가는 흥미]로 번역된다. 가을 들판을 보면 마음이 넉넉해진다. 먹지 않아도 먼저 배가 부를 것만 같다. 온갖 곡식과 과일이 무르익은 가을 앞에서 고마운 생각에 자연을 먹고 사는 나약한 인간들은 그저 숙연해질 수밖에 없다. 겨울을 지새울 넉넉함 때문에 어깨춤이라도 추고 싶었을 심정이었으리라.

시인은 펼쳐진 가을을 보고 군침부터 도는 시상을 보이고, 목화가 익어 하얀 속살을 드러내 보인 상황을 보고 벌써 추운 겨울이 따뜻하게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문 앞에는 벼가 익어 밥을 먹지 않아도 군침부터 돌아 먹을 만하고, 집 뒤에는 목화가 하얗게 피어 입지 않아도 입을 만하다는 시상을 일구어냈다.

이렇게 넉넉한 야흥野興 앞에서 화자는 고맙고 감사한 생각부터 들었을 것은 뻔해 보인다. 멋들어지게 낮잠을 자니 탑상에는 산들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고, 아이는 고기잡이 갔다 돌아오면서 붕어라도 잡았노라고 급히 알린다는 평범한 한 마디를 쏟아놓고 만다. 시상이 종장으로 갈수록 긴장감이 더하여 급박한 것이 아니라 순수하고 차분한 느낌을 받는다.

위 감상적 평설에서 보였던 시상은 ‘벼 익어 먹을 만하고 목화피어 입을 만도, 탑상에 산들바람 불고 고기 잡아 급히 알려’라는 시인의 상상력을 통해서 요약문을 유추한다. 작가는 태촌(泰村) 고상안(高尙顔:1553~1623)으로 조선 중기의 학자이다. 할아버지는 충순위증판결사극공(克恭)이며, 아버지는 증 한성우윤 천우(天佑)다. 어머니는 신천 강씨 습독 희언(希彦)의 딸이다. 1573년(선조 6) 진사가 되고, 1576년(선조 9) 문과에 올라 함창현감 등을 지냈다.

【한자와 어구】
門前: 문 앞. 稻熟: 벼가 익다. 堪: 낫다. ~함직 하다. 爲飯: 밥으로 먹다. 舍後: 집 뒤에. 綿開: 목화가 피다. 可作: 가히 짓다. 衣: 옷. // 午睡: 낮잠. 正: 바로. 甘風: 산들 바람. 단 바랍이란 Ent. 榻上: 탑 위에. 兒童: 아이들. 忽報: 홀연히 알리다. 打魚: 고기잡이를 가다. 歸: 돌아오다.

장희구 張喜久(문학박사 / 문학평론가·시조시인)
아호 : 瑞雲·黎明·友堂
한국문인협회 회원 / 한국시조협회 부이사장
(전)한국시조사랑시인협회 국제교류연구소장
조선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문학박사)
남부대학교·북경경무직업대학 교수 역임
조선대·서울교대·공주교대·광주교대 外 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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