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식
시인, 홍천문화원 부원장, 국가기록원민간위원
우리의 장례문화는 피할 수 없는 인간사의 한 일상적 부분이다. 이제 환절기가 되면 주변의 많은 분들이 생을 마치고 저 세상으로들 간다.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숙명적으로 이 세상을 떠난다. 여기에는 부자든 권력자든 가난뱅이든 예외가 없다. 다만 장례를 지낼 때 그 형식이 조금씩 다를 뿐이다. 허나 망자는 아무 것도 모르고 세상을 뜨고 불구덩이 속에서 한줌의 재가 된다.

사람이 죽으면 가족과 친인척이 다 모인 후 염습을 한다. 망인이 숨진 후 약 3시간 후에 한다(가족이 늦게 모이면 그 이상도 걸린다). 염을 할 때는 대개(종교의식에 따라 똑같지는 않다) 삼베옷(수의)을 입히고 일곱 번 묶은 후 입관을 하는 게 보통이다.

그런데 이 수의가 문제다. 삼베수의를 망자에 입히게 한 것이 우리고유의 장례문화가 아니고 일제강점기 때의 잔재라는 논문이 나왔다(조선일보 2017년 12월 23일자). 논문 발표자인 유재철 연화회 대표는 우리 장례문화 염습(殮襲)의 전문 직업인으로 역대 대통령의 염습을 세 분이나 했고 법정스님을 비롯한 큰스님들의 다비식도 대부분 도맡아서 한 분이다. 지금까지 약 3천여 명의 시신을 염을 했고 수백기의 묘를 이장한 분으로 이 분야에 대한 논문을 발표해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여기서는 그 내용을 인용하고 필자가 직접 경험한 장례문화에 대한 소견을 쓰고자 한다.

지금부터 약 120여 년 전 갑오개혁 이전의 우리 고유 장례문화 중 염습 때 망자에게 입히는 수의는 무명이나 비단(명주)옷이었다고 한다. 그 증거로 100여 년 전의 묘를 이장하다 보면 대부분 썩었거나 산화됐지만 간혹 미라로 나오는 것을 보면 삼베수의는 없고 무명 내지 비단이었다고 한다(홍천에서 장례이장 전문인의 증언). 그렇다면 적어도 백여 년 전에는 삼베를 쓰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삼베수의를 쓰게 된 동기는 일본인들이 우리나라의 무명과 비단을 일본 군인들의 군복인 전쟁물자 공급의 일환으로 수탈해 가면서 삼베를 대신 반강제적으로 사용토록 한 잔재물이라고 한다. 사실 삼베를 꼭 수의로 해야 한다는 문헌이나 유래 전통은 학문적으로나 전통장례예법에도 없다. 근대의 선조들이 그렇게 했으니 그냥 따라서 해온 것이다. 이제 한번쯤 뒤돌아보고 고칠 것은 고쳐야 할 때라고 본다.

몇 년 전만 해도 매장이 많았으나 요즘은 90%가 화장이다. 화장하는데 고가의 수의(비싼 건 수백만 원 이상)를 입혀서 화장하는 것이 과연 자식의 효도며 도리라고 여길 것인가? 다시 한 번 생각해볼 일이다. 물론 생각에 따라서 이 세상 마지막 가는 분들에게 수의 한 벌 제대로 안 해서야 되겠느냐는 반론도 있지만 우리의 고유풍습도 아니고 강압에 의한 풍습을 그것도 형식에 치우쳐서 꼭 해야만 되는지를 생각해봐야 한다.

우리 고유의 수의인 무명은 목화를 심어서 그 열매에서 얻은 옷감이고 비단은 누에고치에서 실을 뽑아 짠 게 비단이다. 비단은 삼국시대부터 있었고 무명은 고려 공민왕 때인 1364년 즉 654년 전에 문익점이 중국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붓뚜껑에 목화씨 3개를 갖고 와 첫 재배를 했으나 2개는 실패했고 한 알에서 싹이 나와 전국으로 퍼졌다. 고려 말엽부터 본격적으로 재배했고 조선시대에 들어와 우리 서민들의 옷감으로 쓰였다. 이런 역사적 배경으로 봐서 망자의 시신 염은 무명이나 비단이 맞는다고 보겠다.

앞으로는 근거도 없거나 희박한 삼베수의는 삼가하고 평소 고인이 즐겨 입던 평상복으로 염을 하고 장례업자의 농간에 놀아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우리의 애경사 예절에 결혼식은 개량이 많이 돼서 현대식으로 하면서 왜 장례문화는 개선이 덜 되고 그대로 답습이 지속되고 있는 것일까. 고인을 위한 엄숙한 예의는 갖추되 그 형식만은 제대로 알고 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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