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식
시인, 홍천문화원 부원장, 국가기록원민간위원
이번 하와이 여행은 동갑내기(41년 신사생)들의 기획된 여행이다. 여행경비가 200여만 원이 훨씬 넘었다. 여행사(엄영석, 스마일관광)의 잘 짜여진 프로그램 속에서 무탈하게 다녀왔다.

특히 하와이 현지가이드 이홍신(64)은 1973년 이민 간 전문 가이드로 역사관이 뚜렷하고 실무자 경험과 지식 상식을 두루 갖춘 명가이드로 자동차를 직접 몰며 투어를 했다. 그는 10살 때 부친을 따라 하와이로 와서 언어적으로 무척 힘들었으나 노력 끝에 대학까지 나오고 대한항공에 취업했다가 여행업을 하게 됐다고 한다. 달변의 말솜씨에 우리는 감탄할 정도로 그의 한마디 한마디를 경청했고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하와이에는 뱀이 없고 땅 속의 생물들이 살지 못한다. 화산석이기 때문이다. 이곳의 장례문화는 삶과 죽음이 공존한다는 개념으로 시내 근처 주택가 등 평지에 있다. 주변에 상점과 식당이 있고 묘지는 평비석에 망자의 이름과 간단한 경력이 쓰여 있다. 간간이 꽃다발이 놓여있어 후손들의 발자취를 엿볼 수 있었다.

미국이 주인인 하와이는 점령 후 원어민보호정책으로 집단마을을 조성하고 이곳에 거주하면 1가구당 월1달러로 형식적인 임대계약(계약기간 99년에 연장 가능)을 하고 있으며 미국 최저생계비인 연봉 4만 달러 이하자에게는 각종혜택이 주어져 4만 불에 이르는 생활수준을 보장한다고 한다. 단 그 원어민이 취업을 해서 연봉이 4만 불이 넘으면 지원이 중단된다. 허니 누가 일하고 4만 불을 받겠는가? 놀면서 4만 불을 받는 것이 낫다. 때문에 원어민 보호장치(지원이 다가 아니라 원어민을 교묘하게 나태화시켜서 자립의도를 상실하게 만드는 차원 높은 제도)를 하고 있다. 이는 이곳만 아니라 미 본토의 인디언이나 뉴질랜드 호주 등에서도 이와 비슷한 제도를 활용하고 있다.

하와이에서는 경제권을 일본이 많이 가지고 있으며 미국인은 일본에 대해서 최초에 재수교(2차 대전 후)할 때 “용서는 하되 잊지는 말자”라는 유명한 말로 일본과 협력 동맹하고 있다.

이곳에는 어디를 가나 있듯이 코리아타운이 있고 하와이에서 제일 큰 한인교회가 있다. 두 번째 큰 교회는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세우고 다닌 한인교회로 교회건물 입구를 서울의 광화문을 그대로 본뜬(축소는 했지만) 건물이 우람하게 서있다. 물론 교민(교인)들의 성금으로 지어졌다고 한다. 교회 뜰에는 정자가 수십 년째 그대로 있는데 지붕의 채색만 고치고 돌의자와 돌책상이 그대로라고 한다. 이곳에서 필자와 일행 등은 기념으로 지인과 사진을 찍었다.

하와이는 미국본토 인구의 약10% 미만이 다녀갔다고 하며 물가는 비싼 편으로 한국소주 참이슬이 한 병에 1만5천 원이다. 또한 하와이는 한국 신혼부부들에게 신혼여행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 우리가 탄 비행기 손님 중 절반정도가 신혼부부 같기도 했다. 미국의 전 대통령인 오바마도 이곳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미 본토의 하버드대학에 갔다고 한다. 또한 이곳에는 국군묘지(미군)가 있어 한인교포 미군이 6.25 한국전에 참전 8003명이 전사해 그 유해가 묻혀 있으며 그들은 한국전 3년간 통역과 보병으로 조국을 위해서 열심히 싸우다 전사했고 한국의 고위인사가 오면 이곳에 와 헌화를 한다고 한다.

군사정부시절 이승만 박사가 귀국하기로 하고 비행장에 도착했는데 정부로부터 갑자기 귀국금지조치가 내려져 다시 두 칸짜리 판잣집으로 귀가 후 몇 주 만에 사망했다고 한다. 이유야 어떻든 안타까운 일이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집권 시 인천의 ‘인’자와 하와이의 ‘하’자를 써서 인하대학교를 설립했다고 한다.

인간은 언제나 고독하다. 특히 솔로는 더욱 그러하다. 이번 여행에서도 싱글맨으로서 참여 일행과 같이 이곳저곳을 관광했지만 마음 한구석은 늘 텅 비고 쓸쓸함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는 인간이 처한 숙명의 길을 남들보다 먼저 겪고 있기 때문이라고 스스로 자문해 보면서 하와이 여행기를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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