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식
시인, 홍천문화원 부원장, 국가기록원민간위원

전 호에서 효는 어버이를 잘 섬기는 일이라고 했다. 그러면 어버이(부모)를 잘 섬긴다는 것은 무엇인가? 어떻게 하면 잘 섬기는가 라는 등식이 생긴다. 잘 섬긴다는 것은 근심걱정 없이 편안하게 모시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면 근심걱정이란 또 무엇인가 의문에 의문을 낳는 것이 현실이다. 이것이 곧 효에 대한 이론이고 철학이다.

성인이 된 자녀는 자기의 본분을 다하고 부모에 대한 도리를 최선을 다해서 지키는 것이 현대의 효가 아닐까 하는 게 필자의 의견이다. 현대 사회에서 부모와 자식이 같이 살기는 사회적 요건이 허락지 않는다. 따라서 대부분의 가정이 분가해서 각자가 산다. 그리고 현대의 젊은이들은 시간에 쫓긴다. 효도를 하고 싶어도 못하는 것이 또한 현실이기도 하다. 효도를 받아야 하는 부모는 나이가 들수록 많아진다.

효도는 각자가 처해 있는 현실에 따라 다르고 계층별로 다를 것이다. 재산이 많은 부모는 정이 그리울 것이고 살기가 곤궁한 부모들은 금전적인 도움이 효로 이어질 것이다. 요즘 세간에 화자가 되고 있는 삼성가를 보자. 총수는 병상에 누워 언제 일어날지 모르고 장남은 법정에 서있고 딸은 이혼소송 중이다. 총수의 아내는 미술관장을 내려놓고 있다. 이들에게 효도는 무엇일까? 누가 누구에게 어떤 것이 효에 가까운지 아무도 단언할 수 없다.

시골에서 농사짓는 부모님께 매달 월급을 쪼개서 용돈 보내드리고 가뭄 때는 가뭄에 대하여 장마 때는 장마대로 피해여부에 대해 안부전화 하고 시간을 내서 자주 부모님을 찾아뵙는 것도 효의 한 사례일 것이다.

노령인구가 점점 많아진다. 평균수명과 기대수명이 많이 늘었기 때문이다. 복지정책도 날로 좋아져서 굶는 백성은 없다. 기대 풍요로움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스스로 행복해질 수도 있고 불행해질 수도 있다.

요즘은 이순(耳順 60세)이나 고희(古稀 70세)를 지나 산수(傘壽 80세)의 노인들이 많다. 이들 중에는 젊어서 공직에 있던 자들은 국가에서 주는 연금으로 잘 살고 있고 그렇지 않은 노인가정들도 복지혜택이 좋아서 최소한의 가정생활은 유지할 수 있다. 이들에게는 경제적 도움보다는 고독과 외로움을 풀어주는 자녀들의 소통이 필요하고 이것이 곧 효의 실천이라고 보겠다.

요즘 젊은이들은 대부분 수도권이나 대도시에 나가 산다. 지방에서 부모님 모시고 생활하는 자녀는 극히 드물다. 일년에 명절(설·추석)이나 기일·생일·기타 애경사 일 이외에는 별로 시골을 찾지 못하는(안 하는) 실정이다.

과거의 효도는 부모님께 용돈 넉넉히 드리고 문안인사 잘하면 효도한다고 했다. 지금도 일부는 그렇기도 하겠지만 좀 다른 차원에서 본다면 외지에 나가 있는 자녀들이 잘 살아 주는 것만도 부모입장에서 보면 효도다. 부모 욕 안 먹이고 자기가 맡은 일 잘하고 행복하게 살아준다면 그것도 효의 한 부분이다.

부모입장에서 욕심을 낸다면 부모의 의견을 가급적이면 따라주는 것도 효라고 할 수 있다. 나이 많은 부모는 실수도 많고 행동거지도 민첩하지 못하다. 귀도 어둡고 눈도 침침하다. 그렇다고 타박하면 이것은 불효다. 나이가 들면 모두가 같아질 것이다.

부모자식지간에는 오해를 해서도 안 된다. 오해의 소지가 있었다면 풀어야 한다. 어느 쪽에서든 상관이 없다. 왜냐하면 어차피 부모와 자식 간의 일이기 때문이다. 낳아서 가르칠 때 조건부인 친부모자식은 없기 때문이다. 부모는 자녀에게 자녀는 부모에게 역지사지로 서로서로 잘한다면 그것이 곧 효가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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