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식
시인, 홍천문화원 부원장, 국가기록원민간위원
벌써 몇 년 전의 일이다. 중고등학교 동기동창이며 매우 가까운 지인이 유명을 달리했다. 그는 죽기 전 예금통장에 수십억 원이 예치돼 있고 재정적으로는 아주 넉넉한 편이었다. 사망의 직접적인 원인은 암이었는데 큰 병원에 가면 얼마든지 고칠 수 있고 완화시킬 수 있었는데도 그러지 아니하고 시골의 한적한 요양병원에서 쓸쓸히 생을 마쳤다. 70대 초반의 나이였다.

그는 고아 아닌 고아로서 초등학교 4학년 때 6.25전쟁으로 인해 아버지는 납치되고 어머니는 두 형제를 사찰에서 운영하는 고아원에 맡기고 자취를 감췄다(훗날 모자가 상봉했지만). 여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지인의 집은 난리가 나기 직전까지 홍천읍내에서 방앗간을 운영하며 4식구가 단란하게 살았으나 전쟁이 나자 방앗간에서 일하던 종업원이 방앗간의 주인이 되면서부터 불행이 시작됐다.

전쟁통에 방앗간 주인이 된 종업원네는 전쟁이 끝난 후에도 향후 수십 년 동안 방앗간을 운영해 큰돈을 벌고 승승장구하더니 말년에는 특별한 이유 없이 집안이 몰락해 장본인은 목을 매 자살하고 아들들도 대부분 70을 못 넘기고 죽었다. 이 두 집안의 둘째아들들이 공교롭게도 필자의 동창들이기도 하다.

지인이 지낸 고아원은 130여 명의 고아들을 1951년 전쟁직후부터 휴전 후까지 오갈 데 없는 남녀 아이들을 돌보기 시작해 오늘날 명동보육원의 시초가 된 곳으로 당시 동면 수타사에서 1960년 초 동면 속초2리에 새로운 보육원을 짓고 식량은 자급자족(농사를 지었음)과 원조로 해결하며 운영됐다.

고아인 지인은 홍천농고 농축산과를 졸업하고 보육원 원장이 당시 강원도의회 의장으로 있어 지인을 강원도청 농산과 임시직원(계약직 사무보조원)으로 소개해 첫 취직이 됐다. 그곳에서 일을 잘하고 직원들의 신임을 얻자 몇 년 후 농협중앙회 강원도지회 소속 별정직 직원(현 무기계약직)으로 특별채용이 됐으며 그 후 다시 모 군농협은행으로 발령을 받으면서 본격적인 은행원 생활을 시작했다.

그 농협에서 열심히 일한 결과 인정을 받아 정식직원이 됐고 몇 년 후 서울에서 금융산업이 호황을 이루며 신규은행이 많이 생겼다. 당시 강원은행과 서울은행 국민은행 등이 신규지점을 낼 때 지인은 서울은행 춘천지점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한 단계 승진했다. 양구에서 자리를 잡나 했더니 춘천사람이 된 것이다.

지인은 은행을 옮길 때마다 한 단계씩 승진을 거듭해 1990년대에는 제일은행 본점 감사역을 하다가 1998년 IMF 금융위기 때는 제일은행 영등포 노량진지점장을 역임했다. 농고 농축산과를 졸업하고 시중은행 지점장을 했다는 것은 현재는 물론이고 앞으로도 유일무이한 일일 게다.

그는 큰딸과 쌍둥이 딸을 둬 딸만 셋이다. 지인은 그 후 서울의 동창과 지인들 간에 우애 좋게 여생을 보내는가 했더니 2010년경 병이 나서 병원을 몇 차례 다니다가 결국 저세상으로 가고 말았다. 지인은 친형을 수년 전 먼저 보내고 그가 직장생활 할 때서야 어머니를 만나 잘 모시다가 돌아가셨으며 서울에서 단독2층에서 잘 살았는가 했더니 그렇지만도 않았던 것 같다는 서울지인들의 얘기다. 부인은 서울 명동에서도 잘나가는 미장원 원장으로 재력으로는 지인보다 훨씬 잘나갔다고 한다.

지인의 최초의 불장난 같은 첫 여인은 고아원시절 1년 후배(여중생)였으나 이루지 못한 비극의 한 소설이었다. 그 여학생은 얼마 후 스스로 목숨을 끊어 고아원생들이 슬픈 장례를 치러줬다고 한다. 지인이 양구에 있었을 때도 여인이 많이 따라서 지인들 간에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어쨌든 고아 아닌 고아로 성장해서 성공한 친구다.

지인은 홍천이나 춘천 서울의 지인들로부터 환영받는 좋은 동창생이었으나 병을 고치겠다는 굳은 의지를 가져보지 못하고 저 하늘나라로 가고 말았다. 그곳에서 첫사랑 여인을 만나고 부모형제도 만나서 단란하고 행복하게 영면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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