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식
시인, 홍천문화원 부원장, 국가기록원민간위원

유월의 아침은 눈부시다. 온 산천이 푸르다. 녹음방초의 계절이다. 사람들의 마음도 이 푸르름 속에 듬뿍 물들었다. 유월하면 지금부터 67년 전 한국전쟁을 생각 안 할 수가 없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의 남침으로 우리나라는 전란에 휩싸이게 된다. 6.25 당시 필자는 시골의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그때는 요즘보다 모내기가 훨씬 늦어(한 달 가량 늦었음) 마침 동네 이웃집에서 모내기를 해 필자를 위시한 아이들은 모두 모종노릇을 했다. 모종노릇이란 어른들이 모판에서 모를 찌면(뽑는 것을 찐다고 함) 그것을 써레질을 한 논에 한 다발씩 가져다 놓는 거다.

어른들은 모를 심고 여자들은 밥을 지어 들판으로 가져오면 일꾼들과 어린이들이 점심을 같이 먹는다. 물론 제누리와 저녁제누리 때에는 참이라고 해서 역시 국수나 취떡 같은 것을 먹는다. 모심기가 원체 힘이 들어 농부들은 많이 먹어야 한다.

우리가 신나게 모종노릇을 할 때 신작로에 인민군들이 북쪽에서 남쪽으로 내려왔다. 그들은 한결같이 철모와 군인모자에 갈잎이나 풀들을 꽂고(위장술) 장총(땅쿵총이라 했다)과 따발총 기관총(해제해서)을 메고 내려왔다. 아무것도 모르는 우리들이 멀거니 그들을 쳐다보면 그들은 손을 흔들기도 했다. 모두가 앳된 얼굴들의 인민군들이었다.

이튿날 우리는 학교에 갔다. 학교 담임선생님께서 난리가 났으니 별도의 연락이 있을 때까지 학교에 오지 말라고 했다. 그 후 여름방학 직전쯤 학교에서 연락이 왔다. 학교에 나오라는 것이다. 우리는 좋아라하고 책보(당시에는 가방이 귀했음)를 들거나 메고 학교에 갔다.

6.25 난리 전의 그 선생님이 들어보지 못했던 노래를 우리들에게 가르쳤다. 그리고 낯선 청년 한명이 또 있었다. 글은 안 가르치고 해방이니 통일이니 여태까지 들어보지 못했던 말들을 했다. 어쨌든 우리는 신나게 놀고 노래만 배우는 동안에 여름은 가고 가을이 왔다. 바로 9.28 수복이다.

대구 근처 낙동강까지 후퇴했던 국군이 유엔군과 연합해서 북진을 했고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서울이 먼저 탈환된 것이다. 퇴로가 막힌 인민군들은 주로 산과 시골길을 택해 북쪽으로 올라갔다. 그 후 1951년 1월 4일 중공군의 참여로 압록강과 두만강까지 북진했던 국군을 비롯한 미군 유엔군 등은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밀려 후퇴를 거듭하고 다시 서울과 중부지역을 적에게 내준 후 전쟁은 계속됐다. 아군과 적군은 많은 희생자들을 내며 1953년 7월 27일 마침내 휴전이 됐다.

그로부터 64년이 지난 오늘 또다시 유월을 맞이했다. 국군장병이나 미군 유엔군뿐만 아니라 인민군이나 중공군 모두가 다 이 지구상의 젊은이들이다. 아군이야 물론이지만 적군들도 그들의 나라를 위해서 싸우기는 마찬가지다.

사상과 이념(이데올로기) 때문에 야욕을 채우려는 못된 지도자 몇 사람 때문에 애꿎은 젊은이들만 죽어갔다. 우리나라는 자유대한민국을 지키려고 수많은 젊은 군인들이 희생됐고 적(인민군 중공군)들은 그들의 목적을 위해 전쟁을 일으켰다가 실패로 돌아갔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참으로 비참한 현실을 많이 목격했고 체험했다. 조국을 위해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린 우리 육·해·공군의 장병들과 이역만리 이 지구상에서 조그만 나라로 알지도 못했던 나라에 와서 싸우다 전사한 미군과 유엔군들 그들의 명복을 다시 한 번 빌어본다. 특히 홍천군 두촌면 장남리에 동상이 세워진 쟝루이 의무장교 출신(프랑스 군의관)과 인제군 인제읍 덕산리에 있는 “리빙스턴다리”의 주인공인 미군 대위인 리빙스턴의 전사를 보훈의 달을 맞이해 또 한 번 음미해본다.

사람의 목숨은 누구나 다 귀하다. 그 고귀한 목숨을 나라를 위해 바친 분들께 이제까지 살아있는 우리들은 후대에까지 이를 알려 보훈의 정신이 마음 속 깊숙이 간직되어 애국의 길로 이어지도록 다짐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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