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들이 중학교 고등학교 다니던 얼마 전 시절이 나에게는 꿈인 것만 같다. 지금은 세숫대야에 장미 꽃잎 떨어뜨려 세족 맛사지도 시켜주는 딸이지만 한 때의 시절엔 대못을 가슴에 총총 박던 시절이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였던가? “매일 매일을 아버지나 오빠에게서 구타를 당하는 가엾은 친구”를 구한답시고 교회 마루에서 그 아이를 안고 잠을 자며 집에 들어오지 않던 시절이 있었다. 그 아이를 집에 데리고 와서 씻기고 먹이고 재운다고 사정사정하는 걸 들어줄 수가 없었다. 집에는 순둥이 아들이 있을뿐더러-옷매무세가 형편없는 그 아이는 반쯤 벗고 다녔고, 도깨비 화장을 했고, 담배를 끊임없이 피웠고, 자주 임신도 했다-딸이 사정사정해서 들여 보내주면 딸아이와 있는 내내, 거리를 돌아다니는 부랑자 오빠, 아저씨들을 불러내어 소주에 삼겹살 먹을 궁리나 하는 아이였다. 그 아이를 못 만나게 하는 온갖 작전을 펼수록 딸아이는 어긋났고, 딸을 그 아이에게서 떼어놓기 위해 그 아이의 아버지를 격렬하게 자극하는 문자를 보내게 되었다. 그로인해, 그 아이의 아버지와 큰아버지로부터 두 아이가 린치를 당하고 밧줄로 묶여 남한강에 수장될 뻔하였다. 딸의 뺨을 때리고 목을 긁어놓고 교정 중이던 이빨을 주먹으로 쳐 입안을 온통 헐어터지게 만들어서 나에게 그날 밤 데려왔다. 딸을 인질로 앞세워 나를 불러낸 그 아이의 아버지는 살해의 의도로 나를 각목과 밧줄로 위협하였다. (다음 주 누리 이야기에서 그 이야기는 풀기로 하자.) 그날의 그 스트레스는 말이나 글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다. 견딜 수 없었고 감당하기 힘들었다. 무지막지한 욕을 하고 휴대폰으로 머리를 짓찧으려 위협하고, 각목을 휘두르며 죽인다고 할 때, 헤어진 남편이 떠올랐다. 그때 그 사람도 휴대폰으로 머리를 찍으려 했었다. 그때 그사람은 거실에 있던 엄청난 중량의 식탁의자를 들어 내 무릎을 찍었다. 왼쪽 다리를 질질 끌고 집밖으로 달아나는 나의 등 뒤에서 나가면 죽여 버리겠다 라는 말과 지금 나가면 다시는 못 들어온다는 협박이 들려왔지만, 공포와 분노로 마구 도망 나왔다. 그 남자는 누워서 입으로만 소리 질렀는데도, 나는 무서웠다. 딸아이 친구의 아버지가, 아이 아버지가 했던 똑같은 천박한 욕을 하고, 똑같이 나의 생명을 위협했다.

그런 종류로 쌓인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해 동네 가까이에 있는 “7080 주점”에 수시로 들락거렸다. 약간의 취기로 무대로 나가 주인장이 두들겨주는 드럼이나 기타 연주에 맞춰 비련의 노래 몇 곡을 되는대로 주워섬기고 돌아오면 약발이 한 나흘은 갔다. 그때 알게 된 이가 바로 안주인 언니였다. 주인장과 안주인은 두 분이 다 재혼이었는데, 장성한 아이들의 혼사문제 등으로 법적인 절차는 생략하고 서로 아껴주는 것처럼 보이며 살고 있었다. 그분들을 보면서 나도 슬그머니 “재혼”에 대한 긍정적인 생각이 들 정도 였으니까.

세월이 흘러 아들이 대학에 가고 고시원방을 전전하며 고통 받자 우리는 이사했다. 그리고 그분들을 잊었다. 얼마 전 우연히 카카오톡에 떠오른 7080 주인장의 프로필 사진과 문구를 보자 그 언니가 생각나 연락을 취했다. 잠깐의 세월, 2년이란 시간동안 숱한 “인간의 사연”이 생겨나 있었다. 언니는 남자의 바람기로 인한 극도의 스트레스로 큰 병을 얻었고, 수술하던 날 남자는 부부의 의리를 깨는 일을 저질렀다 한다. 각자를 만나면 각각 다른 해명 혹은 변명이 있겠지. “의리”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았다. 내 딸이 목숨을 걸고 지킨 그 “거리의 친구”에 대한 의리와, 언니의 남편이 지켜야 했던 아내에 대한 의리와, 세상을 먼저 떠나게 된 배우자에 대한 의리나, 국민 시민을 위한 국회의원 시의원등의 “의리의 스펙트럼”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본다. 결국, 나는 의리란 “다양한 모습”인데다 “갖다 붙이기 나름”이란 우스운 결론을 내리고 말게 된다.

조연재
서울 서초동 소재
조연재 국어 논술 교습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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