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이 살아가는 우리 가족은 각자 살아가는 사회의 테두리에서 부대끼는 것이 너무 힘들때 집에 돌아와 서로의 얼굴을 향해 감각의 날을 세워 다투고 싸우고 상처 입히며 산다.

또 우리는 뭔가를 성취하거나 시험에 통과하거나 그런 일들로 서로 행복할 때, 웃음과 기쁨을 나눈다. 그러한 순간순간을 함께 한다는 것.

2015년 아들의 시간 속에, 딸의 시간 속에 이렇게 함께 있었다는 것의 미래의 기쁨까지 알 것 같다.

한때는 두 아이를 혼자 양육하는 것의 부당함에 치를 떨었던 적 있다.

양육비라는 그 개념에 Focus를 맞춘 채 손해 본다는 느낌 하나로 격분한 적 있었다.

그 숱한 시간이 더미더미 흐른 후 온갖 아픔과 시련과 고통을 함께 겪고 때론 이겨내고 때론 그냥 흘려 보내고, 함께 이 현재의 시간 속에서 나랑 있는 이 아이들은 나의 운명이다.

이 광활한 우주의 작은 생물로 생겨나서 가족이라는 한 공간에서 그가 있고 그녀가 있고 그리고 내가 있다.

이런 그들에게 나라는 한 생물이 해 줄 수 있는 이 노력들은 오히려 나에게 선물이다.

아들의 아프고 따가운 방황 한 줄기가 지나가고 있다.

앞으로 더 엄청나고 더 무서운 방황이 올 수도 있다.

그런들 어쩌리.
방황이 사람을 성숙시키지 않으면 또 어떠리.

성숙한 인간만이 인간의 조건은 아니지 않은가? 난 내 살같은 내 심장같은 내 영혼같은 내 아들의 한줄기 방황의 터널에 같이 기꺼이 들어갔었다.

방황이 싫다고 모범답지를 강요한다면 아들은 결코 스스로가 얻어낼 수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방황하는 대로 고통받는 대로 지켜봐 주거나 몰래 아파했다. 인간에게 방황의 끝은 없다. 마치 우주를 떠도는 유성처럼 부유하고 때론 우주 한 귀퉁이에 머무르고 때론 회전하기도 하는 것이 인생이겠지.

늘 새로운 방황이 시작되는 것을 두려워 하지 말기를 나의 운명들에게 부탁한다. 아플수록 더 큰 성장이 이루어지리라.

방황은 어린 사람 젊은 사람의 통과의례이고 나같이 나이 조금씩 들어가는 사람에게도 똑같은 거치대임이 정답이다.

다시 돌아온 4월 온 국토를 하얗게 물들이는 목련 온 산을 붉게 태워가는 진달래. 어느 집 마당에 피어있는 노란 생강꽃.

이들도 한 겨울의 모진 방황을 이겨 내고 이 봄 저토록 찬란한 성장을 우리에게 선사한다.

나의 운명과도 같은 선하고 고운 아이 둘을 학교에 보내고 빙긋이 웃으며 봄날 고운 단상을 내려 놓는다.

조연재
서울 서초동 소재
조연재 국어 논술 교습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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