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방 침대에 누워 테라스 창으로 시선을 돌리면 키가 큰 나무 한그루 서 있다. 나무는 유난히 키가 커서 작은 바람에도 크게 흔들린다. 간밤 내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쏴~쏴~ 울어대더니 오늘 아침 포도송이 같은 하얀 꽃잎을 피워 올렸다. 관악산 자락 숲 속 숨어 있는 꽃들이 터뜨리는 은은한 꽃향기가 아파트 정원으로 스며드는 월요일 오전이다.

지친 몸의 복원력이 날이 갈수록 더디고 모자란 오늘 아침, 그리운 엄마 목소리를 듣기 위해 여기 저기 아프다는 핑계로 전화를 걸었다. 엄마는 약간 귀찮은 듯 부엌 가스렌지에 뭐 올려 놨다라고 하시며 슬그머니 전화를 끊자 하신다. 흥, 요망한 할머니 같으니라고,...후후

언제고 마음이 병들려고 할 때 지역번호 031로 시작하는 어머니께 전화 걸어 세상사 시름을 스리슬쩍 엄마 어깨에 얹어 놓아 버리고 내마음의 짐은 털어버리는 나는 그런 딸이다.

엄마 생각을 하다 보니 1994년 가을이 생각난다. 그리고 이제는 폭소대신 슬며시 웃음이 번져 나온다. 93년 12월에 만난 중늙은이 형체의 남자를 데려 와 결혼하겠다고 했을 때 부모님과 가족의 반대가 심했다. 우여국절 끝에 이듬해 10월의 어느 날로 결혼식이 예정되었다. 전날 밤 <결혼>에 대한 짙은 회의로 단 1분도 눈을 붙이지 못한 내가 오전 8시쯤, 택시를 불러 결혼식장에 딸린 웨딩샵으로 먼저 갔다.

시간은 흘러 결혼식이 시작되었다. 간밤의 짙은 번민의 징후로 내 눈은 붕어눈처럼 튀어 나왔다. 중늙은이가 극구 골라 준, 레이스가 목까지 올라온 땟국물 줄줄 흐르는 웨딩드레스의 신부 옆에는 친정 가족이 아무도 없었다.

그때까지 나는 고민에 빠져 친정 가족이 아무도 오지 않은 사실에도 둔감했다. 식 진행이 모두 끝날 때까지 아무도 오지 않았다. 막 기념사진을 촬영하려고 할 때 앞머리가 7센티 정도 바짝 서고 저고리 옷고름이 떨어져 너덜거리는 엄마가 뛰어들어 오셨다.

그 당시는 결혼식을 마치 시루떡 찍어내듯이 시간대 별로 진행하고, 빨리 빨리 다음차례에게 신속하게 물려주어야 할 때 였었다. 가족 중 엄마만 들어 있는 가족사진을 찍고 결혼식이 부랴부랴 끝났다.

엄마는 그날 퀵 서비스 오토바이를 타고 오셨다. 신부 엄마인데도 불구하고 옥색 한복을 입으시고, 올림픽대로의 시월 찬 먼지바람을 다 뒤집어 쓰시고 오토바이 뒷자석에 타고 식장으로 오신 것이었다. 아들만 3형제인 시어머니는 막내 아들 결혼식 만큼은 분홍 한복 입고 싶다고 주장하셔서 엄마가 양보하셨다. 퀵 오토바이에 올라 타시면서 옷고름 한 귀퉁이를 밟아 튿어져서 그 모양으로 오시게 된 것이다.

시댁측 편의대로 잡은, 시설이 아주 후진 천호 사거리 예식장에, 그래도 엄마 혼자 퀵서비스라도 불러 타고 달려 오신 것이다. 앞머리를 고데로 말고 헤어스프레이를 뿌렸는데 찬바람에 앞머리가 번쩍 세워져서 한눈에도 우스운 모습으로 달려 오셨다. 거기다 옷고름까지 너덜너덜해진 모습이라니!

그날 예식장에서 부운 눈으로 닭똥 눈물을 흘리던 딸을 향해 무서운 퀵의 속도로 머리카락, 옷고름 흩날리며 달려 오셨던 나의 어머니는 이후로도 쭉 ‘어디선가 무슨 일이 생기면 빛의 속도로 나에게 오셨다.

나는 그런 어머니의 실천궁행을 배워, 매일 아침 나의 가슴에 불을 지피다 이내 까만 숯검정이 다 되도록 ‘자식노릇’ 하는 아들딸에게 외할머니 가르침을 세습하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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