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이른 시간일거라고 잠 속에서 느끼는 아침 무렵, 유선 전화랑 손전화기가 수도 없이 울렸다. 깊은 잠속에서 어렴풋이 벨소리를 들으며 쉬 잠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큰어머니의 장례식장에 가자는 언니의 전화였다. 고속버스터미널로 가니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다.

천안을 지날 무렵, 진눈깨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공주를 지날 무렵엔 이내 함박눈으로 변해 엄지손톱 크기로 날리었다. 공중에서 어지럽게 춤을 추는 눈송이 속으로 들어간 나는 어느새 26년 전 열일곱 살 당차고 야무진 소녀의 모습으로 하염없이 원무를 추기 시작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를 가야하는데 수입이라고는 농사밖에 없는데, 철없는 딸이 아버지께 울고불고 매달렸다. 벌교에 있었던 'S여고'라는 학교에 3년 장학생으로 가라는 아버지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놈아, 네 위에 오빠가 무사히 졸업해야 할 거 아니냐?! 아부지는 네 큰 오빠도 망쳐서, 네 둘째 오빠라도 잘 되야 하는 디...니 동생도 금방 따라 올라 올거인디...제발 이렇게 아부지가 빌자!”

그때까지 단 한 번도 손찌검하지 않으셨던 아버지가 숟가락 통을 요란하게 내쪽으로 던지셨다. 어머니와 동생까지 합세하여 나를 거들었고 우리 집 아침밥상은 울음바다가 되었다.

그날 머리채를 잡히면서도 내 편을 들어주신 우리 어머니 그 사랑을 나는 잊지 못한다. 결국은 아버지의 권유대로 그 학교에 입학하게 되었고, 반항심이 굴뚝처럼 자란 나는 3월이 채 가기도 전에 머리를 노랗게 물들였다.

어떤 식으로라도 가슴에 억눌린 포기한 꿈에 대한 보상이 필요했었다. 날라리 티가 나는 오렌지 색 요란한 티셔츠를 입고 거친 아이들과 어울렸다. 그러기를 몇 개월, 교무실에 수시로 불리어 갔다.

“학교가 너에게 이렇게 많은 것을 베푸는데 너 왜 앞장서서 학교를 비난하고 교사에게 덤비는 행동을 하니?”...

더 이상 학교를 다닐 수 없겠다고 결심하고, 아무도 몰래 고입 문제집을 사왔다. 밤을 새워 공부하였다. 원서 접수가 다가오자 중학교 때 담임선생님을 찾아갔다. 선생님은 늘 '우리 똑순이'하며 몹시 귀여워 해 주었던 분이셨다.

아버지 몰래 시험 본다는 내 말에 보호자 도장을 몰래 파서 찍어 주며 내 등을 토닥이며 격려해 주셨다. 나중에 들은 얘기로 그 당시 도저히 빚에서 헤어날 길 없는 불행한 농사꾼이었던 아버지가 학교에 찾아와 스물여섯 어린 선생님을 붙들고 당신이 책임질 거냐고 원망과 위협을 하셨다 한다. 열심히 공부한 결과 나는 어렵게 명문 S여고에 합격하였다.

당시에는 합격생들의 이름을 길다란 창호지에 세로로 써서 벽에 걸어 두었다. 고드름이 꽁꽁 얼게 추운 날 손을 호호 불며 홀로 합격 여부를 확인하러 갔다. 우수수 떨어진 많은 아이들과 부모님이 울고 있었다. 공중의 벽에서 내 이름을 기쁘고도 슬프게 확인했지만 등록금 문제가 떠올랐다.

아마 교과서 대금을 포함해서 17만 원 정도였던 것 같다. 나는 한시의 지체도 없이 몰래 꼬불쳐 두었던 돈으로 차비를 해서 서울로 무작정 올라왔다. 작은 언니 셋방을 물어물어 찾아갔다. 그곳에는 일흔이 넘은 집주인 할아버지가 문을 열어 주셨다.

언니는 셋방살이가 아니라 곁방살이를 하고 있었다. 깜박 까르륵 잠이 들었는데 언니가 왔다. 자초지종을 들은 언니는 한숨을 쉬며 불같이 화를 낸다. 말도 없이 그냥 와서 그렇게 큰돈을 만들어 내라면 어떻게 하느냐 했다.

지금으로 환산해 보면 하루 이틀 사이에 만들어내기 어려운 액수였다. 그날 밤 언니는 다시 되돌아나가서 그 돈을 만들기 위해 동분서주했던 거 같다.

스물 두 살 어린 처녀애가 동생 고등학교 등록금을 만들려고 그날 밤 그 추운 서울 밤거리를 얼마나 싸돌았을까?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저릿해진다. 언니가 힘들게 구해 온 등록금을 보자마자 달콤하고 슬픈 잠에 곯아 떨어졌다.

다음날 그 돈을 가슴에 품고 고속버스를 탔다. 그런데 그렇게도 예상치 못한 의외의 복병이 숨어 있을 줄이야! 서울을 출발한 버스가 천안쯤 내려갔을 때 펑펑 함박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결국 기어서 기어서 그 차가 순천에 도착한 것은 새벽 1시 무렵이었다. 순천에 아무 연고도 없는 고1짜리 여자애의 난감함을 무엇에 비유 하리! 나는 차가 정읍을 지날 무렵부터 차 안에서 잠자리를 타진하기 시작했다.

내 또래의 여자 애들에게 나의 사정을 낱낱히 이야기 하고 방 빌리는 돈을 얼마를 주겠다고 해서 그 아이들이 재워주기로 했다.

버스에서 내리니 무릎까지 빠질 정도로 눈이 쌓여 있었다. 16시간 이상을 차 안에서 발을 동동 구른 피로감으로 인해 그 애들의 집에 들어서자마자 쉽게 잠에 빠졌었다. 아침에 부랴부랴 정해진 은행까지 걸어 나갔다.

줄을 서서 은행에 돈을 넣을 시간을 기다리는데 내차례가 됐다. 돈을 내고 나오니 하얗게 쌓인 눈에 햇살이 반사되어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아니다, 간밤의 악몽같은 눈길과 길에서 얼어 죽을 상황에 차 안에서 절박하게 잠자리를 구걸한 일들이 떠오르며 열 일곱 소녀의 볼아래로 따뜻한 것이 흘러 내려 눈을 뜰 수 없었던 거다. 집으로 돌아왔다. 아버지의 표정은 복잡하셨다.

아버지는 갑자기 사라진 막내딸 때문에 발을 동동 구르셨고, 어머니는 아버지를 상대로 왜 아들 딸 차별 하냐며 무시무시한 싸움을 거셨단다. 만 3일 만에 무사히 집안으로 들어서는 딸을 보며 그분들은 노여움보다는 반가움이 앞서셔서 아무 말 없이 꼭 안아 주셨다.

아차차...우리 아버지 작은 오빠를 시켜 1985년 12월19일 12시전에 등록하게 하려고 농협으로 오빠를 보내셨단다. 갔더니 이미 등록이 되어 있어서 이 아이가 돈을 어떻게 구했나 모두 의아해 했단다.

이렇게 하얀눈이 엄지손톱 크기로 펑펑 내리는 날이면 그날 밤 서울에서 순천 내려가는 그 아득한 밤길을 잊을 수가 없다. 그때 어린 나는 깨달았다. 삶이란 어두운 밤 눈길 같은 것이란 걸...

남부 지방에 그렇게 눈이 내린 건 나 태어나기 전에도 태어난 후에도 아직까지는 없었다고 한다. 

글 조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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