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0년대에는 진리 나루새를 중심으로 오일장마당이 형성되었다. 그 시장터는 현 홍천문화원에서 홍천관광호텔로 이어지는 길 양편과 홍천주유소에서 학다리기름집 앞길이다. 그 중심은 구인당한약방을 중심으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진리 나루터는 마지기고개(마현, 마치)와 석왕사가 자리하고 있는 분토골, 절골에서 흐르는 개울이 동백아파트 옆을 지나 장공장 앞과 학교(鶴橋)를 거쳐 구비를 이루어 관광호텔 앞에서 다시 구비를 이루어 구인당한약방 위쪽에서 화양강과 합류하였다. 그 개울은 맑고 아이들이 물고기를 잡기도 했던 놀이터였으나, 지금은 학다리기름집 뒤만 빼고 모두 복개되었다.
  서울에서 올라온 배는 이곳으로 들어왔다. 이곳이 서울 마포나루에서도 소문난 진리나루새다. 이곳이 홍천 물류기지였다. 자연 이곳에 장이 들어서게 된다. 또한 이곳은 객사에서 내려다보이는 곳으로 홍천현의 관문이기도 했다.
  객사를 중심으로 한 일대는 안읍내라 하는데 관광호텔 뒤쪽부터 지금의 세방볼링장 뒤 둔덕을 아우르는 곳으로 향교와 객관으로 이어지는 대로가 이어졌다. 
  서울에서 소금, 건어물, 포목 등 물건을 실은 배가 이곳 나루터 안까지 들어왔다는 송화선씨의 장기(거래장부)는 당시 홍천장의 규모를 짐작케 한다. 당시의 보부상 송화선씨는 대림광고 맞은편 로터리 부근에 집이 있었는데, 상호도 간판도 내걸지 않고, 한양(서울)과 활발한 상거래를 이루었다.
  최근 20세기 초 보부상 송화선(宋化善)이 남긴 장기(掌記 : 상품거래 명세서)가 발견되어 당시의 농촌 상거래를 엿볼 수 있다. 150점이 남아 있는 장기는 1910년부터 5년간 주변 상인과의 상품거래 내역을 꼼꼼히 적었는데, 면포·면사·수건·석유·담배·일본 거울·안경 등 수입제품에 관한 기록이 남아있다.
  송화선의 아들 송경섭씨는 독립군들의 활동자금을 지원하는 등 독립운동을 벌이기도하고 1919년 기미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가 체포되어 고초를 겪는다. 그 후 집안이 기울어 홍천을 떠났다고 한다.
  1910년대 들어 서울에서 들어오는 배들이 점차 진리 나루새에서 홍천주유소 뒤편으로 내려와 정박했다. 홍천주유소에서 진리 나루새까지는 가까운 거리였지만 배들이 올라가기엔 물살이 거센 여울이었고 마기기골의 물줄기가 내쳐 배를 대기에 적당하지 않았다. 
  따라서 시장이 점차 홍천주유소 - 홍천문화원 쪽으로 내려가게 되고, 이 지역을 중심으로 상권이 형성된다. 이 당시 홍천장의 상권을 주도했던 상점은 선익상회(홍천주유소 부근)와 건너편에 광신상회(옛 신장대리 파출소)와 홍신상회(현 삼양막국수 부근)였다.
  그 중 선익상회의규모가 컸다. 이형선, 고익진, 이종익, 박한표 씨가 출자를 하여 상점을 열었다. 선익(善翼)이란 상호도 이들의 이름을 따서 붙였다고 한다.  일종의 백화점 같았다고 하는데 주로 포목을 중심으로 담배 등 수입품도 있었다고 한다.
  후에 이전을 하게 되는데 그 터가 지금의 만석집 자리다. 당시에는 이곳에 터미널과 우체국이 있는 중심가였다.
  광신상회도 규모가 컸던 상점이었고, 홍신상회는 싸전(미전)으로 잘 알려졌다. 
  진리에 시장이 서던 시절 중심 도로는 홍천주유소, 홍천문화원, 구인당한약방, 구 평화약국을 잇는 길이었다. 또한 객사가 있던 세방볼링장 일대에는 집들이 많이 모여 있었으며 석화산에서 이어지는 산줄기가 둔덕을 이루고 있고 객사가 자리하고 있었으며 당시의 대로를 이루었다. 당시의 대로는 지금 골목길로 남아있다.
  석화산의 맥이 아직도 이어지고 있는 산이 영산이다. 진리와 갈마곡리의 경계를 이루는 작은 동산이다. 영산에는 모금정이란 정자가 있었다.
  바우설이라고 부르는 석화산은 홍천읍의 진산이다. 온산이 바위로 되어있으며 옛날 신선들이 와서 놀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기도 한다.
  석화산을 배산으로 향교(鄕校)가 자리하고 있다. 홍천읍지에 향교는 호국사 뒤편에 있다가 지금의 자리로 이전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후 향교로 이어지는 골짜기는 향교골로 불리게 된다.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홍천의 맥을 끊기 위하여 일제강점기에 향교를 없애고 신사(神社)를 지으려다가 홍천 유생들의 거친 항의로 지금 명동보육원 자리에 지었다고 한다.
  광복이 되면서 신사를 없앴는데 한국전쟁이 나면서 제이드병원(일명 미군병원)이 들어서게 된다.
  일제강점기에 군청은 세방주유소 건너편(옛 산림조합:지금의 삼천리 자전거대리점)에 있었고 현내(홍천)면사무소는 홍천감리교회 옆이었다.  
  지금은 석화산 아래 홍천군청이 자리하고 있다. 세방주유소 건너편에서 - 1954년 천주교 옆에 군청을 짓고 옮겼다가 -1985년 지금의 자리로 정착하게 된다.
  군청이 옮기면서 읍사무소가 군청 건물로 들어온다.
  지금의 상하수도사업소(홍천군의회 옆)는 경찰서 터였다. 그 앞 로터리를 이룬 광장에는 일본인 학교가 있었다.   
  신장대리는 진리에서 장터가 이곳으로 옮겨온 데서 유래된다. 당시에는 새장터로 불리다가 1916년 행정구역이 통폐합 되면서 신장대라 하였는데 장날도 4, 9일에서 1, 6일로 변경되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장터가 옮겨간 원인은 뱃길을 이용한 수로보다 육로교통이 발달했기 때문이다.
  당시의 홍천 풍경은 황량하다. 집들도 드문드문 하였고 곳곳이 수렁이고 논이었다. 특히 교육청 앞부터 터미널까지는 뽕나무밭이었고 곳곳에 웅덩이가 많았다.
따라서 비만 오면 물난리를 겪었는데, 잿골저수지(토우아파트 뒤 광신연립)를 막고 나서 좀 나아졌다. 지금의 홍천터미널-보건소 - 홍천여고 일대는 일본인 우에야마의 과수원이었다고 한다. 
신장대에는 별다를 소지명이 없는데 그 까닭은 지금의 중앙통 서울약국 신한은행 공중화장실을 이루는 시장터는 대부분 논밭이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문화원앞 2층 건물에 선익악기점이 있었고 동아일보 지국이 있었다고 한다.
  시장이 점차 신장대리로 내려오는데 그 시점이 잿골 어귀에 저수지를 막는 시기와 비슷하다. 그럼에도 신장대와 진리의 경계가 되는 도로(홍천주유소 앞- 구평화약국)를 중심으로 홍천장이 서게 된다.
  소방서는 중앙기름집 (분수대 부근)에 있었고, 우체국은 지금 군농협 주차장 뒤쪽 길가에, 버스정류장은 박의원 자리와  건강목욕탕 자리 두 곳에 있었다.  
  견건장(絹乾場)은 중앙기름집 부근에 있다가 새미정(사미정)쪽으로 옮겼다.
  자리를 옮기지 않은 연초조합은 지금도 그 자리에 있으며 세무서는 홍천여고자리에 있었다. 한약방은 백제장 맞은편에 2층 목조건물에 있었고, 양조장은 갈마곡파출소 뒤 새미장 들머리에 있었다가 경동예식장 입구 중앙낚시 자리로 옮겼다.   
  새장터의 틀이 갖추어지면서 술집과 오락시설이 들어서게 된다. 당시의 소문난 기생집으로는 덕흥관(문화원뒤 강가) 신흥관(공중변소 맞은편) 민선관(진리 축협) 개풍관(연봉 민스튜디오)이 있었고, 여관은 금송여관(구 관동장여관)이 유명했다.
  당구장도 있었는데 구 관동장여관 앞에 있었다.
  홍천에서 오래된 건물을 들라면 천주교성당과 상하수도사업소 정도를 들 수 있다. 이들 건물도 한국전쟁 이후에 지어진 건물이다. 한국전쟁은 무시무시했다. 전쟁 초기에는 바리바리 짐을 싸서 피난을 나갔다가 들어왔을 때는 집들이 온전했다. 그러나 1.4후퇴 때 다시 피난을 나갔다가 들어와 보니 불타고 폭파되고 온전한 집이 한 채도 없었다고 한다.
  폐허의 잔해를 걷어내고 새마을운동을 통하여 거듭나기를 한 끝에 오늘에 이르게 된다.
  홍천읍은 망산령 줄기의 석화산과 섬산(蟾山: 두개비산)이 감싸고 있는 희망리, 진리, 신장대리와 큰골의 개울이 이루는  뒷구렝이(후항: 後巷)와 대기고개마루로 이어지는 범파정 새미정(사미정) 그리고 강 건너 계암(鷄岩)을 포함하는 갈마곡리, 오성산 아래의 검율리와 대기고개 너머부터 여내골 개울이 아우르는 태학리, 그리고 연봉리, 장전평리, 삼마치리, 오안리를 포함하는 홍천의 중심지다.
  화양강을 한때 남천으로 부른 적이 있었는데 이는 객관의 남쪽에 있다는 지명상의 표기이고 영귀미면을 휘돌아 흐르는 덕치천이 합류하고 태학리와 결운리의 경계를 흐르는 여내골 개울도 흘러 너른 강을 이루며 대기고개에서 한번 큰 굽이를 이룬다. 이곳이 풍류가객들이 찾았던  홍천의 범파정이란 누정이 있던 곳이며 사미정 이구선생이 정자를 짓고 후학들을 가르치던 사미정이 있던 것 곳이기도 하다.
  누정 아래에는 귀엉소가 있고 바위 절벽이다. 홍천의 강태공들은 이곳에서 낚시를 던져놓고 고기를 기다린다. 쏘가리 잉어 끄리 눈치 매자 꺾지 메기 자라 모래무지 등 심심치 않게 물린다.
  이맹상은 그의 시문에 홍천에대한 시를 남겼다

푸른 맑은 물이 서로 얼렸고
(山水成雙族 산수성쌍족)
서방은 안개 자욱하구려   
(煙嵐是西隣 연남시서린)

  범파정 건너 강가는 모래밭이 명사십리를 이루었다고 하는데 그 풍경이 시문으로 전해내려 온다.      
  송병선의 동유기(1868)에는  범파정에 대한 중요한 자료가 기록되어 있다.    
  -29일 정축일: 이부자리에서 밥을 먹고 산다현(神茶峴:양평 청운면과 홍천 양덕원 유목정리 사이에 있는 고개. 일명 신당고개)을 넘으니 홍천(洪川)의 지역이었다. 화양강(華陽江)을 건너 읍내에 들어가 범파정(泛波亭)에 올랐다. 정자는 빈관(賓館)의 문루이다. 강의      빛은 옷감을 누인 것처럼 희어서 아름다운 경치를 제공해준다. 판액은 고동(古東) 이익회(李翊會)의 글씨이고, 또 그 밖의 제영이 많았다. 
   특히 남당(南塘) 한원진(韓元震 1682 -1751)이 지은 <次泛波亭壁上韻 범파정 벽면의 운자로 짓다>은 범파정에서 바라보는 풍경의 아름다움과 선경이 잘 나타나 있다

   亭下澄江亭上山(정하징강정상산)
 정자아랜 맑은 물 정자 윈 푸른 산이라
 曲欄人倚翠微間(곡란인의취미간)
 굽은 난간에 기대니 푸른빛으로 물든다.
 幽情遠峀孤雲出(유정원수고운출)
 깊은 정은 먼 산에서 피어나는 조각구름
 倦意長空獨鳥還(권의장공독조환)
 지친 생각은 먼 창공에서 돌아오는 외짝 새.
 塵土幾年愁迫隘(진토기년수박애)
 흙먼지 속 몇 년을 근심으로 쫓기다가
 仙區此日喜寬閒(선구차일희관한)
 선경(仙境)에 선 오늘 여유로와 즐겁다.
 南橋鶴去烟莎綠(남교학거연사록)
 남교엔 학이 가고 푸른 향풀은 흐릿하니
 立望淸都?莫攀(입망청도창막반)
 서서 청도를 바라보나 슬프게도 오를 길 없어라.

  조선 중기의 문신 박장원(朴長遠:1612~71)은 그의 시문집인 구당집(久堂集)의 인유기(麟遊記)에  범파정에 대한 소회를 남겼다.  
  -올해 2월 초 엿새 날 드디어 홍천(洪川)으로 가는 길에 올라 저녁에 범파정(泛波亭)에 당도하여 정자에 올랐다. 범파정은 작은 강이 난간을 감돌아 흐르고, 물고기와 새들이 찾아와 사람들과 어울렸다는 이름인데 직접 와서 보니 듣던 소문과 다름이 없었다.
   또한 안석경은  동유기(1765)에 홍천 범파정에서 감회를 기록하고 있다.  
   8월 21일(갑자) 길을 나설 때 조금 비가 내렸다. 30리를 가서 창봉역(蒼峰驛)에서 점심을 먹었다. 사마치(沙馬峙)를 넘어 홍천(洪川)의 석천(石泉)을 향하였는데, 길옆에는 단풍이 아름다웠고, 때때로 감상할 만한 못〔潭〕과 폭포가 나타났다.
  40리를 걸어서 저물녘에 홍천에 도착하였다. 범파정(泛波亭)에 올라보니, 동쪽 골짜기의 아득한 봉우리는 이내와 아지랑이 사이에서 출몰하였고, 해맑은 앞 강물은 나누어져 두 줄기로 흘러 벽파정의 아름다운 난간 앞에 이르렀으며, 마을에는 구름이 내려앉은 나무들이 있어서 아름답고 상쾌하여 멀리서 바라볼 만한 운치가 있었다.
  돌아가신 아버지께서는 일찍이 이 고을을 다스리셨는데, 우리 자식들은 매번 한가로울 때마다 아버지를 모시고 이 정자에 와서 노닐었었다. 지금 벌써 28년이 지났으니, 굽어보고 우러러 보는 동안에 서글퍼져서 마음을 가눌 수가 없었다.
  정자 처마에 걸려 있는 시판(詩板) 가운데 아버지의 작품이 실려 있는 것이 있었다. 담존재(湛存齋) 이성가(李聖軻)가 홍천을 다스릴 적에 써서 새긴 것이라 한다. 바라보고 두세번 읊어보니 두 줄기 눈물이 절로 떨어졌다.
  윗글에서 사마치는 삼마치이고, 담과 폭포는 옥류동천과 성산터로 오르는 중턱의 폭포로 보여진다
  홍천군지에는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1653∼1722)의 범파정 시문이 실려 있다.

  멀리 영상에는 달이 떠 있고
  흰옷 차림으로 에 오르다  
  술잔 속에 달이 잠겨 이 더하고
  물 위에는 마름이 일렁거린다.
  계류의 물고기는 밤말을 듣고
  바위에는 흰 鶴(학)이 내려 앉는다.
  가야금 맑은 곡조 탈 필요 없고
  풍탄의 운율이 옷에 차온다.

  이만부도 금강산을 유람하며 떠나는 길에 범파정에 대한 감회를 남겼는데 ‘화전의 북쪽 팡봉을 지나 마점우령(麻店羽嶺)을 넘으면 녹효현(綠驍縣)에 이른다. 이곳은 북으로 높은 산은 석화산이라 부르고 또 남쪽으로 긴 시냇물이 휘돌고 있는데 이 시냇물 위쪽으로 범파정이 있으며 질펀한 모래사장이 십리에 뻗어있어 지세가 맑고 그윽한 것이 산협속의 별세계’라고 적고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범파정에 대한 시문은 많으나 터조차 찾지 못하고 있으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누대가 없는 범파정정에서 저무는 강을 바라본다.
  
  물가의 바위에 오래도록 서있던 흰 새가
  물속에 머리를 처박는다.  
  서서히 저녁 물안개가 서린다 
  흘러가는 물살이 노을에  붉게 흐른다.
  이내 어둠이 반겨 줄 것 같다.

  범파정 아래에는 사미정이란 정자가 있다. 백팽년의 외손인 이구 선생이 홍천 결은(결운)으로 유배를 왔다가 복권이 되어 부름을 받았으나 사양하고 낙향하여 사미정이란 정자를 짓고 후학들을 가르치던 곳이다. 
  원래 사미정은 강가에 세워졌으나 그 일대에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뒤로 옮겨 다시 건립되었다. 
 글·사진 허 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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