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농족어옥토 백천합어 홍천’
   (三農足於沃土 百川合於洪川)
  강원도지에 기록된 홍천에 대한 군명부(郡名賦)다. 백 개의 내(川)가 모여 큰 강을 이룬 땅 - 홍천이다. 남산에 올라 굽어보는 홍천은  큰 강물이 동서로 가로질러 흐르고 남북으로 중앙고속도로와  동서로 44번 국도가 지난다.
  5번 국도와 44번 국도가 교차하고 외곽도로를 따라 서울로 동해로 4차선이 이어진다. 홍천을 감싸고 있는 석화산 아래 자리한 홍천군청을 중심으로 형성된 시가지가 수반(水盤)에 놓인 석부작 같다. 화양강이 감싸고 도는 홍천읍내의 모습은 반달 같다.
  읍내를 중심으로 섬산(두개비산)과 석화산 아래로는 희망리가 둘러서고 강가를 앞에 두고 진리와 신장대리가 포란하듯 들어앉았다. 강을 사이에 두고 남서 쪽으로는 연봉리가, 동남 쪽으로는 갈마곡리가 마주한다.
  석화산을 중심으로 포진한 희망리는 양 옆으로 큰 골짜기를 끼고 있고, 갈마곡리는 큰골과 깃골에서 흐르는 개천이 각각 마을의 중심을 흐른다. 연봉 또한 오룡산이 남산을 이루고 그 능선이 푸른 갈기를 휘날리며 내리 뻗어 연봉을 들어앉히고 삼마치- 장전평의 개울을 터준다. 
  홍천의 자랑은 사통팔달로 이어지는 교통의 요충지다. 
  현재 홍천읍이 되기까지 고구려 시대에는 벌력천현으로 칭하여 오다가, 신라 경덕왕 때 녹효로 고쳐 삭주(지금의 춘천)의 영현이 되었다. 
  고려시대 들어 제8대 현종 9년(1018년)에 홍천으로 고치고 현내면이라 부르기도 했으며, 제17대 인종 21년(1043년)에 감무를 두고, 별호를 화산현이라고 하였다. 조선시대에 비로소 현감이 부임하게 되는데 태종 13년(1413년)이다. 
  홍천에 들어오면서 우선 객관을 찾았다.
  자료로 남아있는 기록은 찾을 수 없고 그나마 구전으로 떠도는 자료들을 정리하여 찾아 나설 수밖에 없다.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의 이야기다.
  조선시대 지방관직의 직제는 관찰사(觀察使) 1명과 도사(都事) 1명씩을 두었고, 각 고을에 따라서 부윤(府尹), 목사(牧使), 대도호부사(大都護府使), 도호부사(都護府使), 군수(郡守), 현령(縣令), 현감(縣監)등의 수령(守令)을 두었으며 주요 도(道=길을 말함)의 역(驛)을 담당한 찰방(察訪) 또는 역승(驛丞)을 두었다. 그리고 각도와 부(府), 주(州)등 큰 고을에 교수(敎授), 훈도(訓導), 심약(審藥), 검률(檢律) 등 관직을 두었다. 
  현감이라는 직책에 대해 조금은 알아야 할 것이 있는데 현감은 수령(守令)으로 총칭된 지방관의 하나이다. 통일신라시대에는 현의 규모에 관계없이 모두 현령(縣令)이라 하였고, 고려시대에는 큰 현에는 영(令), 작은 현에는 7품의 감무(監務)를 두었다. 이는 조선 초기까지 계속되다가 현감으로 고쳐 종6품의 외관직(外官職)으로 정하였다. 조선시대의 현감은 현령(종5품)이 관할하는 현보다 작은 고을의 원님이었다. 당시 지방의 말단기관장인 역(驛)의 찰방(察訪:종6품)과 동격인, 지방수령으로서는 가장 낮은 관직이었는데 조선시대의 현감은 138명에 이르렀다.
  따라서 홍천에는 현감을 두었지만 종6품의 수령이었다. 즉 홍천은 큰 현이 아닌 작은 현이었다.
  그러면 현감은 어디서 일을 보았을까? 그 객사는 어디였을까?
  수령이 사무를 보던 객관의 위치를 찾아 여든이 넘은 어르신들의 기억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기억을 더듬어 정리해 본 결과 현감이 머무르던 객사는 지금 세방볼링장부터 삼호식당 앞쪽의 지역으로 짐작된다( 일부 수성장여관 뒤편 일대라고도 한다).
  그 지역엔 홍천군청이 있었다.(군청-등기소- 산림조합- 지금 삼천리자전거) 그곳이 정말 객사가 있던 터일까?
  서거정(徐居正)의 학명루기(鶴鳴樓記)는 홍천 객사의 자리를 찾는 유일한 자료이다. 학명루(鶴鳴樓)는 오간(五間)이며 정통 무진년에 현감 윤지가 짓는다(홍천읍지). 그 기록에 윤지(尹志)라는 수령이 나온다.
-‘정통(正統) 무진년 봄에 윤후(尹侯) 지(志)가 뽑혀 수령으로 왔다.’
정통 무진년(1448)은 세종 30년으로 서거정의 나이 29세 때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시기의 윤지에 대한 기록을 찾지 못했다. 또한 세종실록에도 나타나지 않았고 문종실록에도 보이지 않는다. 다만 서거정의 학명루기에 나타난 내용으로 보면 그의 성품을 알 수 있다.
 - 한 달이 채 못 되어서 정사가 크게 시행되었다. 3년 경오년 가을에 비로소 객관의 동쪽에 누(樓)를 세웠다. 그 누 앞에 못을 파서 연꽃을 심고, 매번 공무의 여가가 있을 때마다 누에 올라가 조망하여 막히고 답답한 가슴을 통창하게 하였다. 하루는 고을 안의 부로들을 누에 초대하여 낙성연(落成宴)을 벌였다. 그 자리에서 누의 이름을 어떻게 지을     까 문의하니, 고을의 늙은이가 말하기를, ‘객관의 앞 수십 보(步)의 거리에 옛날에 학교(鶴橋)라는 다리가 있었습니다. 처음에 이루어졌을 때에 학(鶴)이 와서 울었으므로 다리이름으로 하였다고 합니다. 학은 우리 고을의 상서(祥瑞)입니다. 청컨대, 이것으로써 누(樓)의 이름을 지으십시오.’ 하였다. 후(侯)가 그 의견에 좇았다. 이해 겨울에 후가 서울에 와서 나에게 말하기를, ‘《춘추(春秋)》에는 공사를 일으켜 경영한 것은 반드시 기록하였으니, 백성의 역사(役事)를 중하게 여기기 때문인 것이다. 지금 우리 수령된 자는 거의 다 백성을 수고롭게 하고, 많은 사람들을 동원하며 흉년인데도 거사(擧事)를 지나치게 하여 누(樓) 한 채를 세우고 정자 한 채를 짓고는 반드시 크게 과장하여 써서 그 공적과 유능(有能)을 자랑하고 있으니, 이것이 무슨 의의가 있겠는가. 나는 이러한 이름을 싫어한다. 다만 그대는 과분하게 하지 않는 사람이기에 한마디를 얻어 누(樓)를 지은 해와 달이나 기록하고자 하네.’ 하였다.-
  이 기록에 나타난 내용을 바탕으로 살펴보면 ‘객관의 동쪽에 누를 세웠고 객관의 수십보 앞에 옛날에 학교(鶴橋)라는 다리가 있었다.’고 한다.
  학교(鶴橋)는 옛 평화약국 앞 기름집 뒤편에 놓였던 다리이다. 지금은 복개되고 개울을 볼 수 없지만 (학다리 기름집 뒤에는 개울이 남아 있다) 나무와 흙으로 놓은 다리였다고 한다. 
  기록에 나타난 것처럼 ‘객관의 동쪽에 누(樓)를 세웠’고 ‘객관의 앞 수십 보(步)의 거리에 옛날에 학교(鶴橋)라는 다리가 있었’다는 내용에 맞추어보면 그곳은 너무 거리가 멀다. 그러면 어딜까? 
  당시에 연못이 있던 자리는 홍천관광호텔 옆쪽의 중앙 연립과 홍천초등학교 정문 앞 체육관, 명륜독서실 일대에 연못이 있었다. 
  홍천초등학교 앞 연못에서 겨울에는 스케이트도 타고 빙상대회도 열렸다고 한다. 그 연못 한가운데는 섬처럼 둔덕을 이루었고 한때 정자가 서 있었다고 한다. 그 누정이 학명루였는지는 모르지만  연못이 메워지면서 몇 번의 자리를 옮겼다가 사라지고 말았다.
  또한 홍천관광호텔 옆 중앙연립에 있었던 연못은 규모가 작았으며 자연적으로 생긴 연못이라는 점에서 기록에서 어긋난다.
  객사의 위치에 대하여 고민하다가 우연히 ‘조선시대 사료를 통해서 본 홍천’<홍천문화원, 2000, 강대덕 편저>에 수록된 ‘해동지도- 홍천현’지도를 보게 되었다.
  지도에는 홍천현의 관가의 위치가 나타나 있다. 현내면을 중심으로 지도에 나타난 관가는 다섯이고, 홍천읍지에 기록된 공청(公廳)은 열하나로 객사(客舍), 아사(衙舍), 문루(門樓), 군기고(軍器庫), 향청(鄕廳), 군관청(軍官廳), 현사(縣司), 작청(作廳), 장영청(仗令廳), 관노청(官奴廳), 옥(獄) 등이 있었다. 이 많은 건물들이 들어서려면 마땅히 범위도 넓어진다.
  먼저 해동지도 홍천현에 나타난 건물 위치를 보면 객(客)이라 쓴 건물이 향교에서 내려오다가 오른쪽에 위치하고 사(舍)라 쓴 건물이 좀 멀리 떨어져 자리한다. 또 향교 왼쪽으로 좀 떨어져서 옥(獄)인지 아(衙)인지 불분명하게 쓴 건물이 자리한다. 그리고 관수당(觀水堂)이 강가의 미륵당 부근에 자리하고 범파정(泛波亭)이 객사 오른쪽 강가에 자리한다.  
  지도를 보고 지금의 위치를 찾는다면 객관의 부속 건물 중 하나인 舍(사)가 구보건소(현재 홍천감리교회 옆이다. 이곳에 현내면 군내면 홍천면 사무소가 있었다. 지금은 공원) 부근으로 추정되며, 따라서 학명루의 위치는 아마도 이 객사의 동편 쪽인 홍천초교 앞 노인회관 부근으로 여겨진다.
  또한 지도에 나타난 객(客)이라는 건물이 객사라고 여겨지는데 그 자리는 세방주유소 건너편 둔덕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추정하는 까닭은 소지명 때문이다. 즉 관광호텔 뒤쪽 부근의 옛 지명은 안읍내다. 즉 읍내의 중심이었다는 것으로 주정한다.  
  서거정의 기에 나타난 것처럼 학명루라는 이름은 윤지가 명명한다. 즉 하루는 고을 안의 부로들을 누에 초대하여 낙성연(落成宴)을 벌였다. 그 자리에서 누의 이름을 어떻게 지을까 문의하니, 고을의 늙은이가 말하기를, ‘객관의 앞 수십 보(步)의 거리에 옛날에 학교(鶴橋)라는 다리가 있었습니다.  
  처음에 이루어졌을 때에 학(鶴)이 와서 울었으므로 다리 이름으로 하였다고 합니다. 학은 우리 고을의 상서(祥瑞)입니다. 청컨대, 이것으로써 누(樓)의 이름을 지으십시오.’ 하였다. 후(侯)가 그 의견에 쫓았다.
  서거정은 ‘누(樓)를 지은 해와 달이나 기록하고자 하’는 윤지의 이야기를 듣고 학명루기를 쓰면서 윤지의 사람됨을 은근히 드러내고 있다.
  홍천 객관에 대한 기록은 홍천군청에도 자료가 없어 여든이 넘은 어르신들의 기억과 구전을 수집하고 서거정의 학명루기와 홍천읍지, 해동지도를  바탕으로 구성해 본 것이다.  
  학명루에서 읊은 시문(詩文)을 찾는다면 좀 더 객관의 자리가 분명해질 것이다.   
  객관의 위치가 중요한 것은 당시의 생활상과 관련이 깊다.
  객관을 중심으로 도로가 개설되었고 시장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당시의 중심지는 '나루새(진리)'였다.  '진리 나루새'는 '닥바우'로 가는 나루터였고, 부근에 '미륵당'이 있었다. 따라서 진리 ‘나루새’는 강가 쪽으로는 지금 종합문화복지관이 들어선 부근이고, 이곳 가까운 곳에 ‘미륵당’이 있다.
  '미륵당'은 진리 석불이다. 구인당한약방 옆에 자리하고 있다. 지금은 석화산을 향하여 서있지만 월래는 남산 거북등을 향하여 서 있었다고 한다. 한국전쟁 때 머리 부분이 떨어져 나갔으나 주민들이 복원하였다. 특별히 전해 내려오는 유래나 전설이 없다. 
  높이 2.28m, 어깨 너비 0.8m이며 손모양은 오른손을 가슴에 대고 왼손은 배에 붙이고 있는 모습이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은 좌우대칭을 이루고 있는데, 몸 전체를 가리고 발등만 노출시켰다. 밑부분이 땅속에 묻혀 좌대가 있는지의 여부는 알 수 없으나,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여겨진다.  
  '진리'는 크게 '진리나루새', '악거리(옥거리, 옥바치)', '안읍내', '진리비행장'을 아우르는 작은 마을이다.
  '안읍내'는 홍천관광호텔 뒤편의 주택가로 예전에는 객사가 있었던 곳이라고 하며, 안읍내라 부르게 된 것은 현내면의 중심이자 객관 근처에 형성된 마을이라는 의미로 보인다.
  근대에 들어서면서 지방관청이 들어서게 된다. 홍천군청은 지금 세방주유소 맞은편에 있었고,  '옥거리'는 홍천현의 옥이 있었던 곳으로 군의회 앞 오른편 로터리 부근이 된다.
  '진리 나루새'는 '대성 제재소'와 복지관 부근이다. 당시 향교에서 홍천관광호텔 뒤편으로 내려오는 길과  안읍내를 가로지르며 난 길이 큰길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골목길을 이루고 있는 이 길이 홍천현의 옛 사진이나 지도에 나 있는 큰길이다.
  '진리비행장'은 한국 전쟁 후에 생긴 지명으로 지금의 종합문화복지관이 된다. 1954년 비행장이 들어섰다가 70년대 '태학리 개포전'으로 이전하게 되고, 그 후 재건학교가 들어섰다가 종합복지관이 자리를 잡게 된다. 
  '나루새'를 중심으로 오일장이 서고 노점이나 상점이 들어섰다가 1932년 이후 교통이 발달하고 1943년 청평댐이 건설된후 홍천강의 뱃길이 끊이면서 점차 신장대리 쪽으로 장마당이 내려가게 된다. 
  '신장대리'는 말 그대로 새장터이다. '진리 나루새'를 중심으로 형성된 장마당(1900년대)이 점차 홍천주유소와 평화약국을 잇는 길가에 형성(1920)되었다가 지금의 구시장터(1950년 이후)에 자리를 잡게 된다.
  당시에 장꾼들의 짐을 보관하던 곳은 홍천신협 아래의 건물이었는데 이 일대가 상권의 중심지였다고 한다.
  신시장을 짓기 전의 장마당은 강원도에서도 몇째 안 가는 큰 장이었다. 지금의 신시장과 구시장을 합친 ‘ㅁ’형태의 장마당은 볼거리, 먹거리가 풍성하였다고 한다.     
  지금은 세블럭으로 나뉘어져 상권이 형성돼 있고, 오일장은 상권에서 밀려나 구 소방서 터에서 명맥을 유지해나가고 있다.
  홍천읍내를 감싸고 있는 마을은 '희망리(희망동)'이다. '두개비산'과 '석화산' 아랫마을로  '잣고개' 밑에서부터 '마지기고개', '향교골', '홍천고등학교'까지 넓게 자리하고 있다.
  '당간지주'가 서있는 '개때배기'와 '성재'밑의 '성여동', '홍천터미널' 앞쪽의 '오리정', 화동리로 넘던 '마지기고개', '학교(鶴橋)'가 있었다는 '학다리', 향교가 자리한 '향교골'이 지금도 불리는 지명이다.
  홍천여고 뒷산은 '두개비산(蟾山)'이다.  석화산성지와 성터, 봉수대, 팔각정 등이 있고 등산로도 개설되어 있어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다. 
  석화산은 향교골 뒷산으로 홍천의 진산으로 알려져 있지만 찾는 이들이 그리 많지 않다.  지금은 산자락에 홍천군청과 향교가 자리하고 있다.
  섬산과 석화산 사이에는 '재골'과 '마지기고개'가 있다. 재골 어귀인 토우아파트는 재골 저수지의 제방이었고 잿골체육공원이 들어선 골은 저수지였다. 저수지를 막으면서 도서관, 서울약국, 터미널, 축협 등의 지역이 발전하게 되었고, 저수지를 막기 전에는 재골의 물줄기가 홍천여고 앞쪽을 지나 잣고개 밑으로 빠져나갔다.
  지금은 '재골'과 '중화계리'를 잇는 재골터널이 공사 중이고, 공원 안쪽으로는 경찰추모탑 약수터와 공동묘지가 있다.
  '재골'은 원래 '성재골'이다. 성이 둘러싸여있다 하여 붙여졌고 '성여동'은 성재 아래에 형성된 마을이다.  지금의 홍천여고와 그 뒷산일대를 말한다.
  '마지기 고개'는 희망리에서 화동리로 넘어가던 고개다. 마제현 또는 마치라고도 불렀는데 고개 모양이 말발굽과 같이 생겼다고 하여 마지기로 불린다.
  마지기 고개로 오르다보면 석왕사길과 마지기길로 갈라지는데 석왕사가 있는 골에는 '절골'과 '금광굴', '분토골'이 있고 골막은 '망산령'으로 이어진다.
  또 마지기고개로 오르는 골짜기는 '화장터'였다. 
  희망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성황사터'다. 동백아파트 뒤쪽의 골짜기이다. 홍천읍지에 자취가 남아 있는 절이지만 지금은 '지야서낭당'으로 지금도 당제를 드리고 있다.
  '향교골'은 향교가 들어선 골이다. 향교가 처음 들어선 곳은 지금의 '호국사' 뒤쪽인데 지금의 터로 옮기면서 '향교골'이 되었다.  
  '향교골'에서 이어지는 능선은 나직나직하다. 지금은 아파트와 주택들이 들어서있지만 작은 동산으로 남아 있는 산이 있다. 마라도횟집 뒷동산이다. 이산은 ‘영산’이라 한다. 영산에는 지금 이씨 문중의 묘가 있지만 그 자리에는 ‘모금정’이라는 작은 정자가 있었다고 한다. 또한 왕대박 할인매장 뒤편에는 홍천에서 제일 큰 대궐 같은 집이 있었다고 하는데 한국전쟁 때 소실되었다. 모든 기억은 과거다. 미래를 알려면 과거를 알아야하고, 현재에 충실해야 한다.
  그것이 문화이고 전통이다. 옛 이름에 남아있는 자취는 오랜만에 들어도 정겹게 와 닿는다.
글·사진 허 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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