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루정'에서 바라보는 '대미산'은 한 폭의 동양화다.
  바위사이로 청정한 소나무가 눈(雪)에 반해 더욱 푸르다. 
  이번 기행에서 '대미산'이라고 부른 것은 홍천읍지에 명기된 지명을 따른 것일 뿐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목산'이니 '성묵산'이라고 부른다.
  대미산을 둘러쌓은 산성은 아직도 자취가 선명하다. 일명 '대미산성'이다. 그러나 '이괄산성'이라 해야 더빨리 알아듣는다.
  홍천군에는 대미산성을 비롯해 석화산성, 오성산성, 내면 방내리성터, 운문산의 운문산성, 오음산성, 북방성치산의 성동리성터가 있다고 하나 오음산성과 성동리성터는 전설과 기록에는 남아있지만 흔적은 찾기 힘들다.
  또한 봉수지(烽燧址)도 산성과 연계하여 전해오는데 우선 석화산성의 봉화산과 와동의 깃대봉 봉수지, 장전평리의 봉화선 봉수지, 남면 유목정리의 두루봉 봉수지 등이 전해오고 있다. 그 중 석화산성 안의 봉화산 봉수지와 와동리 깃대봉의 봉수지는 흔적이 남아있지만 나머지는 자취를 알아볼 길이 없다.
  대미산성은 언제 축조되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기록에 나타난 대미산성은 <신증 동국여지승람 권 40 홍천 > 편과 <연여실기술(燃藜室記術) 別潗 권17>, <여지승람>,<관동지>,<홍천현읍지> 등에 기록되어 있다. 
  그중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대미산성 석축 주 이천 일백 구십칠척 고칠척 금반퇴락 (大彌山城 石築 主 二千 一百 九十七尺 高七尺 今半頹落 )>이라고 상술하고 있다.
  지금도 대미산에 오르면 산성의 흔적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홍천 남산 산행의 들머리인 '여우고개'를 오르다보면 '대미산성지'라는 표석을 볼 수 있고, 성수리에서 성목재로 오르는 어귀에도 '성목산성지'라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는데, 산행을 하다보면 석축과 축대, 와편 등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대미산성에는 이괄과 관련된 많은 이야기들이 전해오고 있다. '이괄산성'을 비롯해 '이괄바위'와 '이괄이소', '군량뜰', '이괄봉', '이괄의 우물터', '이괄굴', '성무재', '이괄의 장독대', '이괄의 말무덤' ,'이괄 아버지무덤', '야루정' 등이다. 이밖에도 팔봉산과 태학리 등에도 이괄의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대미산성을 이괄과 연계하여 풀어나가는 것이 재미있을 듯싶다. 대미산성에 대한 역사적 가치와 전설의 인물 이괄을 연계시켜 산성을 둘러보며 산행의 재미와 흥미를 더 할 수 있겠다.  
  '이괄(李适)'은 비운의 장수였다. 무관출신으로 문장과 비법에 능하였다. 인조반정의 공신이면서, 이괄의 난을 주도한 인물이고, 삼일천하를 누렸지만 역적으로 몰려 38세의 짧은 생애를 마감한다. 그의 본관은 고성(固城)이고, 자는 백규(白圭)이다. 원래는 철성 이씨였는데, 이괄의 난으로 인해 고성이씨로 바뀌었다. 따라서 고성이씨의 시조이다.
  이괄은 1587년 선조 20년에 태어나서 1624년 인조2년에 이천군 묵방리에서 죽었다. 반역을 역모했다는 이유에서인지 <이괄의 난>에 대해서는 자세히 기록되어 있지만 이괄이 언제 어디서 태어났는지는 기록에 없다. 그러나 역사는 그를 기억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그의 관적(官蹟)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1599년 선조 32년의 행적이다.
- 선전관 이괄이 도망가는 항왜(降倭)를 잡아 참수했다’는 기록이다. 그의 나이 12살이다.
12살에 선전관 -왕의 시위(侍衛)·전령(傳令)·부신(符信)의 출납과 사졸(士卒)의 진퇴를 호령하는 형명(形名) 등을 맡아본 일종의 무직승지(武職承旨)의 구실을 한 무관(武官)-이 되었다면 그는 열 살 안팍에 무과에 급제한 셈인데, 10살배기의 무예가 얼마나 출중했는지 짐작 가는 대목이다.  또한 이를 계기로 이괄은 명천 현감에 제수되어 북쪽 오랑캐를 막아낸다. 이후 제주도 대정을 걸쳐 형조좌랑-태안군수- 경성판관- 영흥부사- 북병사- 제주목사를 두루 걸치고, 북병사(北兵使:함경도 병마절도사)에 제수되는데 임지로 떠나지 않고 인조반정에 가담한다. 인조반정은 1623년(인조 1) 서인(西人) 일파가 광해군 및 대북파(大北派)를 몰아내고 능양군(綾陽君) 종(倧:인조)을 왕으로 옹립한 사건이다. 이괄은 이 사건에 큰 공을 세웠으나 2등 공신이 되어 이에 반역을 꿈꾼다. 1624년 이괄은 드디어 반란을 일으키고 홍안군을 왕으로 추대하였지만 적장 이수백과 기익현 등에게 죽는다.-
  위의 기록에는 홍천과 관련된 내용은 없다. 그럼에도 대미산성에 이괄의 이야기가 많이 전해지는 것은 이괄의 천부적 무예 때문이라 여겨진다.
  열 살 무렵에 무과에 합격한 이괄은 전설적인 인물임에 틀림없다.
  <한국지명총람>에는 '대미산성'을 '이괄이산성'이라 별도로 기록하고,‘둘레 900m, 높이 4m 돌로 쌓았는데, 조선 광해군때 이괄이 인조반정을 하기 전에 이 산성에서 무술을 닦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괄은 대미산에 산성을 쌓는데 '부사원고개'에서 돌을 옮겨 쌓았다고 한다. 그 후 '이괄성터'라 부르고, '이괄봉'에는 돌담으로 쌓은 길이 신작로처럼 쭉 뻗어있었다고 하며, 이괄이 이곳에 보물을 숨겨놓았다고 한다. 
  '이괄봉'에서 건너다보이는 '오성산'은 거북이 형상이며, 다섯 가지의 소리가 난다 하여 '오성산'이라 부르는데, 오성산 정상에는 바위들이 널려있는데 '이괄의 장독대'라고 한다. 이곳에 장독을 놓고 이괄봉과 오성산 사이에 밧줄을 매어놓고 조석으로 장을 떠다 먹은 사람은 이괄의 누이다.
  이괄은 이 산 봉우리에 '야루정(耶樓亭)'이란 누각을 짓고 살았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마을사람들에 따르면 '야루정'은 '이괄의 장독대'가 있는 산봉우리 아래 둔덕에 있었다고 한다. 실제로 정자가 있던 자리에 서보니 '이괄봉'과 '이괄바위', '이괄이소'가 한눈에 들어온다. 다만 야루정에 대한 시문은 찾을 수 없어 아쉽다.   
  '이괄바위'는 '오성산'에 있는 큰 바위라고 하는데, 실제로 오성산에는 큰 바위가 없고 마을사람들도 '이괄바위'는 '이괄봉' 아래 강가로 이어진 바위능선을 두고 말한다 하였다. 
  '이괄바위'는 너래반석을 이루고 있어 열댓 명이 앉아 놀 수 있었다고 하며, 이곳에서 이괄이 무술을 닦을 때 자기의 애첩을 떨어뜨리고  땅에 떨어지기 전에 먼저 뛰어 내려가서 받았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이 바위에 올라가본 사람들은 별로 없고, 해마다 부엉이가 이 바위에 와서 새끼를 쳐 나갔다고 하여 부엉바위라고 부르기도 한다. 지금은 도로가 나면서 다 없어지고 강가에 암벽만이 흔적처럼 남아있다.
  이괄바위 아래는 '이괄이소'가 있다. '야루정' 앞이 된다. 이곳에는 보가 있는데 이 봇물은 '검율리 응달말', '군량뜰', '갈마곡리 소옥개(소동개울)뜰'로 흘러든다.
  그러나 보 어귀에서부터 이어지는 수로는 '군량뜰'과 '응달말', '소옥개'를 가로지르는 성수천의 물길이었고, 또한 개울이었다고 한다. 이곳에 보를 막고 제방을 쌓으면서 지금과 같은 뜰이 만들어졌다. 지금도 이 물줄기의 중간중간에는 작은 연못도 있고, 퇴수를 이루는 곳에는 커다란 저수지가 있었다.
  이 '소옥개뜰(소동개울)'에 택지를 개발하여 아파트가 들어서고 홍천여자중학교를 이전하였다.
  이괄은 이괄바위에서 이괄이소로 뛰어내려 물놀이를 하며 술과 여자들과 어울렸다고 한다. 전에는 6-7m 되었는데 길을 내기 위하여 이괄바위와 산을 허무는 바람에 많이 메워졌지만 지금도 2-3m 된다. 특히 이괄이소 아래 막은 보로 물은 호수를 이루고 이괄봉의 산그림자가 비껴들어  풍경을 자아낸다.
  이괄바위 주변에는 바윗돌이 많은데 산성에서 벌어진 전투로 떨어뜨린 바윗돌인지는 알 수 없다. 
  이괄바위 앞의 논 한가운데는 '이괄의 말 무덤'이 있었다. 이괄이 무관이었던 만큼 말을 잘 탔다고 하는데 특히 그가 아끼는 말은 화살보다 빨랐다고 한다. 어느 날 이괄은 자신의 말과 내기를 한다. 이괄이 말을 타고 화살을 쏜 후 화살보다 목적지에 먼저 도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활을 쏜 후 말을 달려 목적지에 도착했는데 화살이 보이지 않았다. 이괄은 말이 화살보다 늦은 걸로 생각하고 말의 목을 베어 죽였는데 말이 뒤뚱거리며 쓰러지는 순간 그제야 화살이 날아왔다. 이괄은 자신의 경솔함을 뉘우치며 아끼던 말을 묻고 돌무덤을 만들어 주었다고 한다. 
  말 무덤은 오랜 세월동안 이괄바위 앞에 자리하고 있었고, 마을사람들은 그 주변에 땅을 개간해 농사를 짓게 되었다. 어느 해든가 땅 주인은 말 무덤을 헐고 벼를 심었지만 벼농사가 되지 않아 다시 말 무덤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그 후 경지정리를 하면서 파헤쳐 없어졌다고 한다.
  이괄바위 위쪽 '이괄봉'에는 '이괄의 아버지 무덤'도 있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이 이야기에는 이괄은 어렸을 때 이곳에서 살았다는 이야기를 암시하고 있는데, 이괄이 어렸을 때 청개구리처럼 뭐든 반대로 했다고 한다. 이괄의 아버지는 지관이었는데 이곳 산봉우리를 보니 왕이 나올 천하의 명당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곳은 시신의 머리가 강 쪽으로 가도록 거꾸로 묻어야 하는 곳이었는데, 이괄의 평소 습관을 생각해서 머리가 산을 향하도록 묻으라고 했다. 그러나 평소에 불효막심했던 이괄은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부친의 뜻을 따라 묻었다고 한다.
  그 후 이괄은 장수가 되고, 난을 일으켜 용상에 앉았지만 사흘도 안 되어 역적으로 몰려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이괄의 아버지 무덤에 얽힌 이야기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도 전해온다. 이괄의 아버지는 자신의 무덤에 콩 서 말, 팥 서 말, 조 서 말, 수수 서 말을 같이 묻으라고 했는데, 나중에 보니 콩은 장수가 되고 팥은 조총이 되었으며, 수수는 철환이, 조는 총알이 되어 쏟아져 나왔다고 한다. 
  이괄의 산성으로 올라가면 볼거리는 더 많다. 우선 이괄의 굴과 우물이다. 산성을 쌓을 때  숙식을 해야 하는데 물은 필수 요소다. 이괄의 우물은 낙엽이 잔뜩 쌓여있어 찾기 어렵지만 바위사이에 작은 항아리를 이루고 있고 지금도 조금씩 솟아나고 있다.
  이괄의 굴은 자연동굴로 입구에서 4-5m 안쪽으로 열댓 명이 둘러앉을 수 있을 만큼 널찍하다. 마을사람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이곳에서 놋수저와 사기그릇 등이 나왔다고도 한다.
  굴 속에는 이괄의 혼령이 깃들어 있다하여 굴 끝까지 들어가 본 사람은 없다고 한다. 이괄봉을 중심으로 곳곳에 쌓은 축대 등을 쉽게 찾을 수 있는데 산성의 흔적으로 보인다. 더러는 기와조각이나 주춧돌도 남아있다.
  이곳을 중심으로 전해지는 많은 이야기들 중에 군사 훈련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남아있다. 검율리의 '군량뜰'은 이괄이 군사들에게 먹일 곡식을 쌓아 두던 장소라 하고, 북방면 하화계리와 소매곡리 사이에는 이괄이 군사들을 훈련시켰다고 하는 훈련장이 있었다고 하며, 당시 북방사람들에게는 대과(大科)를 주지 않아 벼슬자리를 주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또한 팔봉산에도 이괄의 이야기가 전해온다. 옛날 이괄 장군이 팔봉산의 용과 내기를 했는데 용은 팔봉산의 물길을 바꾸고 이괄은 서울을 갔다 오는데, 누가 먼저 하느냐는 것이었다.  지금도 팔봉산 뒤로 가면 하얀 물 자갈돌이 있다고 하는데 이 자갈돌은 용이 물길을 바꾸면서 나온 자갈돌이라고 한다. 
  설화로 전해지는 이야기이지만 이괄이란 인물이 주는 신비성과 그의 무용담은 새로운 테마 여행지로 개발한다 해도 손색이 없을 듯하다.
  이괄은 홍천에서 반감을 주는 인물로 비추어지지 않는다. 왜일까? 아마도 당시의 사회상을 반영하는 듯하다. 정치와 사회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 민심 아니겠는가?
  '여우고개' 건너편의 '바지뜰'을 돌아들면 '야루정'이다. 이괄바위 앞에서 콧구멍다리를 건너 오성산 이괄의 장독대 아래쪽이다. '야루정'에서 '당뿌리'쪽으로 내려오면 44번 국도가 지나고 비로소 화양강과 만난다. 
  내촌 '백우산' 줄기가 이어져 내려오다가 마지막으로 '오성산'을 이루는데 그 끝이 '당뿌리'이다. 당뿌리의 끝은 '능지소'의 단애를 이루며 절경을 이루는데 지금은 상수원보호구역이라 들어 갈 수 없다.
  예전에는 '당뿌리'에 연못이 있었다. 지금은 논이 되고 일부는 도로로 편입되었다.
  어느덧 영귀미를 돌아 홍천읍내로 들어섰다.
  '성수천'은 서석면 생곡리 미약골에서 발원한 화양강과 합류한다. 두 물줄기가 몸을 섞는 모습을 본다. 태학리와 검율리를 가르며 '대이고개'에서 몸을 틀어 읍내를 둥그러니 감고 흐른다.
  최근에 검율리와 태학리를 잇는 다리가 놓이면서 읍내를 에두른 길이 틀을 갖추었다.
  '태학리'는 홍천군의 행정타운이 들어선 곳이다. 종합운동장이 완공되면서 강원도 민속경연대회를 치루기도 했다. 이후 농업기술센터와 경찰서,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이 자리를 잡고 노인복지관과 장애인복지관이 '여내골' 어귀에 들어선다.
  '태학리'는 '개포전', '안말', '대기버덩', '여내골'이 합쳐진 마을이다.  '여내골'을 경계로 결운리와 경계를 이루고 '대기고개'를 경계로 '갈마곡리 새미정', '뒷구랭이', '큰골'과 경계를 이룬다.
  태학리는 비행장을 빼놓을 수 없다. 홍천에 비행장이 처음 들어선 곳은 '송정 만내골' 어귀였다. 미 2사단 산하에 있다가 육군 항공대로 소속 되면서 읍내 '진리'에 터를 잡는다. 지금의 종합문화복지관이 들어선 터인데 항공대가 옮겨 간 후 재건학교가 들어섰다가 지금의 태학리로 옮겨갔다.
  지금의 항공대는 '개포전'이다. 화양강과 성수천이 밀고 밀리며 합수를 이루는 곳이며 '여내골'의 물이 흘러드는 내치기 아래쪽으로 너른 버덩이었다. 버드나무와 잡목이 우거지고 강은 너른 여울을 이룬다. 이곳에 홍천읍 상수도취수장이 있다. 취수장 아래로 최근에 행정타운과 검율리를 연결하는 다리를 놓았다.
  태학리에는 두 마리의 학이 있는데 그 하나가 홍천 공설운동장의 능선이고, 나머지 하나는 대기고개로 이어지는 능선으로 학의 목을 타고 넘는 44번 옛 국도가 나 있다.
  '태학'이란 지명은 이괄의 장인이 태학이란 서당을 짓고 아이들을 가르쳤다고도 하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안말'은 '대기고개' 아래로 '면학골' 앞의 작은 부락이다. 44번 옛 국도가 마을 한가운데를 지나며 상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여내골'은 '북방 성동'으로 넘어 다니던 길이었다. 이 길은 춘천으로 가는 지름길이기도 했다. 골 어귀에는 체육관과 활터, 테니스장이 있다. 테니스장 건너편은 '붉은바위골'이고 활터 뒷골짜기는 '망자골'이다. 다리를 건너면 노인복지회관과 장애인복지관이 자리하고 있다.
  골안으로 이어지는 골짜기는 결운리의 주봉과 대룡산에서 이어지는 '갈마곡 뒷구랭이 큰골'과 경계를 이루는 능선을 따라 크고 작은 골자기를 이룬다.
  '동등에골' -'솟대매기골'- '논골'- '말골'- '전대지미골'- '살구나무골'을 지나면 '깃대봉'이 아래의 '성지미골'이 나오고 '서드래골'을 지나 죽 올라가면 '절터골'로 이어지는데, 이 골짜기들은 주봉 능선을 따라 난 골짜기이고, '짐승에골'- '석장골'- '작은 더덕골'- '큰더덕골'- '작은 비양골' -'큰비양골'을 지나면 막창인 '밤나무골'이다. 밤나무골에서 산마루를 넘으면 '성동'이 나온다. 골안은 안개로 뿌옇다.  바람이 얼음처럼 차다. 계곡의 물줄기는 얼음이 얼어있고 지난번에 내린 비에 얼음은 녹으면서 물이 흐른다. 
  흐르는 것이 물뿐인가? 홍천강 기행도 벌써 2년이 흘러간다. 
  이제 홍천 객관을 찾아 읍내로 들어선다. 
 글·사진 허 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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