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경인년(庚寅年)은 60년만에 돌아온 호랑이띠로 백호에 해당한다고 한다.
  경인년의 경(庚)이 색상으로는 백색을 뜻하고, 인(寅)은 호랑이를 의미한다. 백호(白虎)해는 상서롭고 좋다는 의미로 통설된다.
  역학적으로 경인년은 큰 변화와 충돌을 의미하는 해다. 경(庚)은 강하게 응결하는 금(金)의 기운을,인(寅)은 나무(木)처럼 지면을 뚫고 성장을 시작하려는 강력한 성장력을 뜻한다.
  호랑이는 동물 중에서 다른 동물에 비해 몸집이 크다고 할 수 없으나 용맹하고 날렵하여 숲속의 제왕의 자리를 지켜가는 강한 동물이다. 숲을 지배하기고 하지만 산의 대왕으로 존재하기도 한다. 백호는 산신령이라고 한다.
  호랑이의 기질은 강력한 힘으로 영역을 지키고 제왕으로 군림을 하지만 주변의 동물들을 보살피고 배려하고 관리하고 다독이지는 않는 동물이다. 때문에 강할 때 강하고 약할 때 무관심한 동물이고 자신에게 직접적이지 않으면 관심도 없고 선이 굵고 큰일에 대응을 하나 작은 것은 귀찮아하는 동물이다.
  그러나 새해 큰 변화의 물결은 여러 분야에 걸쳐 긍정적인 에너지를 발산할 것으로 보인다. 정리와 변화, 충돌의 과정을 통한 부산물로 새로운 패러다임과 성장 동력이 탄생할 수 있다. 
  가장 큰 변화로는 물질문명의 발전이 계속되면서 정신문화를 보다 중시하게 되는 시대도 열린다.  또한 에너지의 주권이 석유 시대에서 바이오와 신재생 에너지 등 '친환경' 시대로 옮겨가게 될 것이라고 예견하고 있다. ‘성수리’를 찾은 것은 새해 첫날 눈이 내린 아침이었다. 해맞이를 하고 ‘후동 동막리’ 어머니께 인사드리러 가는 길에  들렀다.
  예전에는 읍내에서 ‘여우고개’로 돌아가거나 ‘깃고개(짓고개)’를 넘어다녀야 했던 시절도 있었지만 ‘오룡터널’이 개통되면서 10분이 채 걸리지 않는 홍천읍내 생활권에 들게 되었다.
  고개를 넘는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심리적으로 거리감을 주지만 터널은 거리감을 좁혀주고 도시의 생활권으로 끌어들이는 흡인력이 있다.
  ‘오룡터널’은 1999년에 착공하여 5년만에 임시 개통했다. 지지부진했던 시간이다. 오르막도 가파르고 내리막도 가파른 산중턱의 터널이라 눈 내리는 겨울철에는 여전히 위험하다.
터널을 빠져나오면 ‘재앞’이다.
  ‘성재’는 ‘성전(城前)’, ‘성치(城峙)’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성목산’의 고개를 두고 부르는 이름이다. 지금은 ‘자앞’ 혹은 ‘자패’라고 많이 부르는데 이는 ‘성전’이라는 지명에서 온 이름들이다. ‘자패’라고도 하는데 원래는 ‘재앞’이다.
  성은 ‘대미산성’을 두고 말하고 ‘재앞’은 ‘성목재앞’을 두고 말한다. ‘자앞’은 ‘재앞’을 달리 부르는 말이고 ‘자패’는 ‘자앞에’를 달리 부르는 말이다. 부르는 말이 많다는 것은 이에 달린 이야기가 많이 전해 내려온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선 ‘성수리’를 둘러본다.  ‘성수리’는 크게 ‘성전’과 ‘집골’, ‘수동’으로 크게 세 부락으로 나눌 수 있고, ‘닭미뜰(당미뜰,당무뜰)’과 ‘중뜰’, ‘개사리뜰’, ‘안시무개뜰’과 ‘재앞뜰’이 너른 버덩을 이룬다.
  ‘성수’는 여흥민씨의 집성촌이다. 홍천 항일독립운동의 뿌리를 이루고 있는 ‘성수리’는 지금도  여흥민씨들이 많이 살고 있다.
  ‘성수리’가 세간에 알려진 것은 ‘새마을운동’과 맥을 같이 한다.
  1969년에 태동한 새마을운동의 기본정신은 근면·자조·협동이다. 근면(개척정신)은 각자 또는 우리 모두가 일상생활에서 보람을 갖고 부지런히 일하는 새로운 국가건설을 위한 기본 소양을 갖추는 것이고, 자조(주인의식)는 남에게 의존하지 않고 자기의 책임을 전가하지 않으며 자신의 어떠한 어려움도 스스로 극복해 나가는 한계 극복의 실천 정신이며, 협동(공동체정신)은 일정한 공동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정신적·육체적으로 다 같이 함께 노력해 가는 자기 확대의 실천 원리의 정신을 바탕으로 펼친 ‘잘살기 운동’이다.
  나 혼자만이 아니라 내 이웃, 내 마을 나아가 우리 모두가 더불어 잘살기 위한 것으로,  단순한 물질적인 풍요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윤택도 함께 이룩하자는 것이다.  
  새마을 노래는 당시의 국민 가요였고, 모든 행사에 빠지지 않고 부르던 행사곡이었다.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 / 너도나도 일어나 새마을을 가꾸세
살기 좋은 내 마을 우리 힘으로 만드세 
초가집도 없애고 / 마을 길도 넓히고/ 푸른 동산 만들어 알뜰살뜰 다듬세,
살기 좋은 내 마을 우리 힘으로 만드세.
서로서로 도와서/  땀 흘려서 일하고 /소득 증대 힘써서 부자 마을 만드세.
살기 좋은 내 마을 우리 힘으로 만드세.
                                          - 새마을 노래-

  ‘새마을 운동’은 1983년부터 국가주도에서 민간주도의 새마을운동으로 탈바꿈하고, 국가(지방정부)는 예산 일부를 지원하고, 새마을이 기획, 집행, 예산의 일부를 담당하는 구조로 변화하였다.
  새마을운동의 초기사업은 환경개선, 농촌소득증대, 의식개혁(문맹, 도박 등등)분야에서  점차 이웃돕기(민간부조) 활동이 확대되어 왔으며, 오늘날의 새마을운동은 변화된 현실에 맞는 새마을운동을 펴기 위해 노력하는 과도기라고 할 수 있다. 
  새마을운동의 기본정신을 소중히 지켜가면서 새로운 세대의 경쟁력 강화를 위한 3C정신-변화(Change)도전(Challenge)창조(Create)-을 더하여 ‘뉴새마을운동SMU’으로 변화된 국민의식과 운동 여건 등 시대적 상황에 부응하고 있다.
  또한 새마을 운동은 시대적 상황에 적정한 과제를 선정하여 실천하는  4대 중점 운동 Green Korea 운동 을 전개하고 있다. Green Korea 운동은 Green새마을운동, Smart Korea 운동, Happy Korea 운동,G1obal Korea 운동이다. 홍천군새마을지회의 사업도 이웃과 함께하며 건강한 녹색환경을 만드는데 중점을 두고 있다.
  ‘성전마을’은 새마을 운동의 모범 사례 마을로 선정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견학을 다녀가기도 했다. 지붕개량사업과 담장, 소하천정비 및 교량 놓기, 화장실개조 등 주민 모두가 새마을 운동에 참여하였다.
  지금도 ‘성전뜰’의 경지정리와 마을 안길 등은 당시 새마을사업의 흔적이다.
성수의 ‘중뜰’은 ‘만대산’의 개운천과 ‘오음산’의 월운천, ‘먹방산’의 먹방천, ‘삼현개울’의 물줄기가 합쳐 성전천을 이루는 곳으로  하천이 범람하여 이룬 기름진 땅을 가진 곳이었다. 그러나 이곳은 물이 넘쳐흘러 늘 농사에 어려움이 많았다.
  마을의 숙원사업도 수리시설정비와 제방공사로 물난리에서 벗어나는 일이었다. 그 일은 곧 경지정리와 하천정비 사업으로 해결되고 성수리의 버덩은 문전옥답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그 버덩이 하천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이 겨울마다 벌어지고 있다. 홍천강의 골재가 바닥나자 골재업자들은 성수리 ‘안시우개뜰’ 근처의 논들을 차례로 파헤치고 골재를 채취하고 있다.
  ‘성전’에는 아직도 옛 모습의 집들이 ‘성목산’기슭에 옹기종기 자리 잡고 있다. 성목산 기슭으로 이어지는 ‘성목골’ 어귀에는 민병태·민병숙 열사의 추모비가 세워져있다.
  민병태(閔丙台) 열사는 독립운동가이다. 자는 경택(敬澤)이고 호는 화은(華隱)이며, 민병숙(閔丙肅)열사의 자는 경운(敬雲)으로 역시 독립운동가이다. 
  열사는 조선말기 고종황제의 국장에 참가하여 3.1만세를 불렀다가 일본 경찰에 쫓기는 몸이 되었다. 그 후 1개월간 산 속으로 피하여 있다가 고향인 ‘홍천군 동면 성수리’로 돌아왔다. 그는 4월2일 아침 군중 수백 명이 모여 민병찬의 선창으로 대한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하다가 민병선 면장이 내일 다시 하자고 제의하여 4월3일 다시 모여 민병태 열사가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뒤 홍천읍을 향해 행진하던 중 일본 헌병 지전 상등병이 길을 막자 열사의 동생 민병숙 열사가 항거하다가 총탄을 맞고 쓰러졌다. 이에 분격한 병태 열사도 항거하다 쓰러지니 성난 군중이 노도와 같이 밀려가 난투극이 벌어졌으나 무차별한 관헌의 난사로 군중들은 흩어지고 말았다. 이들 민병태, 민병숙 두 형제 열사를 기려 1965년 홍천읍 유지들이 뜻을 모아 높이 1.5m 폭 50cm의 추모비를 세웠다.
당시의 의병장 민병찬 의사는 대전국립묘지에 안장했다. ‘성목골’ 안으로 들어가 보니 석산개발을 하던 잔해가 그대로 남아있다.
  집들이 다복하니 자리 잡은 마을 뒤로는 ‘작은골’, ‘큰골’, ‘넙접골’이 ‘성목산’으로 이어지고, ‘재골’에서 흐르는 실개천이 구 마을회관 옆으로 흘러 나가고 있다. ‘재골’은 예전에 기와집이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고을이다. 경주이씨가 이곳에 자리 잡은 곳이라고도 한다. ‘재골’로 오르다 ‘옻약물골’로 오르면 옻샘이 있는데 오뉴월 염천에도 얼음처럼 차다. ‘옻약물골’로 넘어가면 ‘깃골’의 ‘분토골’로 이어지는데 그 안에 공동묘지가 있다.
  ‘재골’의 골짜기는 터널이 뚫리면서 도로와 합쳐졌는데 네거리를 이루는 그 자리는 바위벼랑이 있었다는 ‘바름별’이다. ‘안시무게 뜰’을 가로질러 ‘짓골’로 올라갔다. ‘집골’은 원래 ‘깃골’이다. 한자로는 羽洞(우동)이다. ‘깃골’은 영귀미에서 붙인 지명이라기보다 홍천읍에서 붙인 지명이라고 여겨진다.
  홍천읍 객관(客館) 앞 ‘남교(南橋 혹은 학다리)’에 모였던 학이 이 고개를 날아가다가 깃을 떨어뜨렸다 하여 붙여진 지명으로 ‘홍천읍 갈마곡리 새말’과 ‘영귀미 성수리 깃골’을 넘나들던 고개다. ‘깃골’은 학이 깃들던 마을로 소나무가 울창했다고 한다.
  ‘장마터골’을 지나 다리를 건너 방앗간을 지난다. ‘깃골’ 어귀다. 예전에는 이곳을  ‘금포’라고 했다. ‘금포’는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솔무정’을 이루고 있었다 한다. 뭔가 깊은 뜻을 품고 있을 것만 같아 여러 어른들께 여쭈었으나 뜻을 알 수는 없다. 그 자리에는 지금 성수리 게이트볼장이 들어서 있다.
  게이트볼장 앞개울 건너 골짜기는 ‘분토골’이다. 골안으로 들어가면 ‘충립이골’과 ‘서덕골’이 있고 공동묘지가 있다. 능선을 넘으면 터널어귀의 ‘재골’이다.
  ‘금포’에서 좀 더 골안으로 들어서면 ‘청룡안’이다. ‘청룡안’에서 ‘삼현’으로 넘는 고개는 ‘상재’인데 고개를 넘으면 ‘삼현 작은저수지’가 나오고 ‘석장골로 이어진다.
  ‘청룡안’ 어귀에서 조금더 올라가면  아름드리 소나무가 나온다. ‘막골’과 ‘짓고개(깃고개)’를 넘어 다니던 사람들이 쉬어가기도 하고 치성을 드리기도 하던 서낭당인데 당집은 사라지고 소나무만 남아 서낭당이 있었다는 이야기만 전해준다.
  ‘짓고개’로 이어지는 길은 임도이자 남산정상으로 이어지는 등산로이다. 이 길은 원래 ‘깃고개옛길’이다. 고개를 넘으면 ‘갈마곡리 새말(새마을)’이 나온다. ‘짓고개’는  월운 후동 개운 사람들에게는 장(場)보러 넘나들던 고개로 이 고개를 넘어 읍내 오일장을 보러 다녔다. 쌀이나 콩, 옥수수, 팥 등 곡물을 두어말 씩 머리에 이고 새벽녘에 집을 나섰던 어머니는 이제 여든의 나이를 바라보고, 장에 가신 어머니를 마중 다녔던 자식들은 오십 줄을 넘어 환갑을 바라본다. 
  오음산, 만대산 아랫마을의 아들들도 고개를 넘어 고등학교를 다녔다. ‘장차’(장꾼들과 장짐을 장마당에 실어다 주던 차)라도 오는 날이면 덜 고생스러웠지만 차비가 아까워 고개를 내쳐 달려 넘었는데, 그들도 벌써 오십대 중후반이 되었다. 예전에는 모두 걸어 다녔다.
반백의 나이가 되었다는 말은 인생 고개를 몇 번 넘는 동안 얻은 나이지만 그들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이 고개는 고향을 찾을 때마다 회자 되곤 한다. 
  어귀의 ‘곧은골’을 지나 몇 구비를 더 돌아 오르면 고갯마루가 나온다. 그 길은 남산으로 가는 길목이다. 이 ‘짓고개(깃고개)’를 기준으로 ‘여우고개’쪽으로 ‘오룡산’, ‘성목산(대미산)’이 이어지는데 특히 ‘성목산’을 중심으로 암릉(岩陵)의 봉우리를 이루고 있는 이 일대는 ‘대미산성(大彌山城)이다. 이 산성을 두고 이괄산성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여우고개에서 가파른 절개지를 오르면 둔덕에 ‘대미산성지(大彌山城址)’라는 표석이 서있다.
  옛 홍천읍지에는 ‘대미산’이 있었고 ‘대미산성’도 기록되어 있다. 언제부터 성목산으로 부르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대미산성’은 바로 ‘이괄산성’을 두고 말하는 것이다. 산성에 대한 전설과 산성에 대한 연구는 많이 이루어졌고 또한 그 흔적과 일치하고 있다. 그 흔적이라는 것이 그냥 흔적이 아니라 추위를 피할 수 있는 동굴과 우물 그리고 축성의 흔적이다. 
  과연 이괄이 살았는지는 차후에 이야기하기로 하고,‘여우고개’로 돌아 넘어다니게 된 것은 자전거가 들어온 시기라고 생각되지만 실제로는 경운기가 들어오면서부터 큰길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짓고개’로 오르는 길은 이제 남산정상으로 가는 등산로가 되고 있다.
  홍천의 진산은 ‘대룡산’- ‘구절산’- ‘망령산’으로 이어지는 ‘석화산(石花山)이고  남산은 오음산에서 이어져  홍천읍내를 넉넉하게 품는 산이다. 그 사이를 화양강이 감돌아흐른다. 남산을 오르는 ’남산골‘에는 삼림욕장이 개장되어  등산객뿐만 아니라 산행을 즐기는 매니아들의 호평을 받고 있다. 
최근에 남산 정상에는 정자를 세우고 ‘남산정’이란 현판을 걸었다.
  ‘남산’은 홍천의 옛 이름인 ‘녹효(綠驍)’에 닿아있다. 홍천은 고구려시대의 벌력천현(伐力川縣)이 신라 경덕왕(景德王) 때 녹효(綠驍)로 개명하여 삭주(朔州 : 현재의 춘천)의 영현(領縣)이 되는데 바로 ‘녹효’란 남산의 형상을 두고 말한 것이다. 남산은 홍천의 남쪽에 있는 산이란 정도이지만 ‘녹효’에는 홍천의 기상과 역사성을 두고 있음은 물론이다. 
  성수 짓골 이야기가 남산으로 커졌다.
서낭당 소나무를 지나 왼쪽으로 들어서면 ‘막골’이다.    ‘지당골’,  ‘버드나무골’을 지나면 ‘남산’으로 오르는 등산로인 ‘웃막골’이 나오는데 어귀에 산에 들어 산사람이 된 산 꾼이 살고 산막에는 작은 암자가 들어서 있다. 남산의 뒤편이라 이미 어둡고, 먼 산마루에는 눈썹만큼 남은 저녁햇살이 살곰살곰 몽실몽실 구름을 매만지고 있다. 
  ‘짓골’에서 나오니 게이트볼장에서 운동을 마친 어르신들이 집으로 돌아가고 있다. ‘짓골’에서 ‘수골말’로 오르는 길은 농로다. 산 밑으로 이어지는 길과 버덩 한가운데를 지나는 길이 ‘수골’어귀에서 만난다.
  ‘수골’은 ‘수동’이라 하는데 골짜기에 수통이 있었다. 그 물을 끌어들여 벼농사를 졌고 그 일대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살게 되었다. 지금은 대부분이 인삼밭이거나 소를 키우고 있다. 
  수골로 오르는 뒷산은 삼현 배나무골과 등을 맞대고 있으며 그 산등으로 이어지는 작은수골과 무태골은 아랫수골, 수골의 원골은 웃수골이고, 삼현과 경계를 이루는 골짜기는 큰 복골이다.
  ‘성수’는 ‘성전마을’과 ‘수골말’이 합쳐진 마을이다. 뒤로는 성이 둘러서고 앞으로는 물길이 휘돌아 나가는 배산임수의 마을이다. 
  ‘성수’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너른 버덩이다. 홍천에서 지평선이 보일만큼 넓은 뜰을 가진 마을이다. 
  ‘만대산’과 ‘오음산’의 물줄기가 ‘노루터’, ‘돌모루’에서 개운천과 만나고 ‘삼현 무네미’와 ‘중뜰’, ‘개운절뜰’사이를 지나 먹방천과 만나고, ‘삼현개울’이 흘러내리면서 ‘당무뜰(닭미뜰)’과 ‘안자리뜰’을 가르며   ‘짓골’물과 만나 ‘안시무개뜰’을 이루고 성전천(성수천)으로 합류한다.
  그 너른 뜰의 물꼬는 대동맥을 이루는 개운천이다. 개운다리 위의 ‘당무보’, 다리아래쪽의 ‘개사리보’, ‘중보’, ‘오리소보’, ‘넝보’, ‘안시무개보’, ‘큰보’, ‘거렁애보’, ‘새보’, ‘농막보’, ‘둔지보’에서 농토로 이어지는 수로가 실핏줄처럼 뻗어있다.
그 뜰은 ‘재앞뜰’ 수변공원의 ‘이종호 시비’를 지나   ‘성수천’을 건너 ‘덕치 비선들(비석뜰)’까지 이어진다.
이종호 시비에 그의 시‘다 털고 가는구나’전문이 새겨있다.
  이종호 시인이 화두로 삼았던 것이 사랑이다. 가난했지만 사람(삶)을 사랑했고 홍천을 사랑했고 자신의 순수를 지키며 살다간 그가 ‘다 털고 간’것은 사랑이다. 
그는 ‘속초’와 ‘노천리’ 경계의 교회 묘지에 묻혔다.
  무덤이 반쯤 묻힌 씨앗처럼 보인다. 뭔가 돋아날 듯하다.                                       글·사진 허 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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