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운(開雲)’
  구름을 열어 제치고 펼쳐진 마을이라는 뜻일까?
  넓은 뜰을 가진 마을이다. ‘만대저수지’에서 바라보는 개운뜰의 저녁풍경은 한폭의 풍경화다. 그 뜰은 개운 ‘돌모루’를 지나 삼현 ‘무네미’를 거쳐 성전 ‘자패’에 이르기까지 지평선을 이룬다.
  너른 뜰을 가졌기에 공작산에서 오음산에 걸쳐있던 구름도 이곳에선 개운(開雲)하였으리라.
  ‘개운’은 후동과 월운, 방량, 삼현, 성수, 속초가 둘러싼 한 가운데 자리하는 마을이다. 
  사통팔달의 중심이면서 오음산과 만대산의 물줄기가 합수를 이루는  마을이다. 장마만 지면 마을은 온통 돌무더기가 쌓이는 등 난리를 겪어야했다.
  그래서 붙여진 소지명 ‘돌모루’를 중심으로 ‘산수골’, ‘개운절’을 아우르는 개운은 ‘만대저수지’가 준공되면서 황금벌판을 이루는 옥토로 거듭난다.
  마을 한복판이라 할 수 있는 ‘돌모루 네거리’에는 커다란 느티나무 정자목이 있고 개운리보건소와 마을 공동창고, 마을회관이 자리한다. 방앗간과 특히 담배가게가 있다.
  ‘후동리’와 경계를 이루는 ‘개운천’을 따라 만대저수지까지 올라가면 ‘음시랑(웅시레이)’이 나온다. ‘음시랑’ 능선 마루는 ‘산수골’의 막치미다. 이 능선의 주봉은 ‘묵방산(먹방산)’이다. 따라서 ‘묵방산’의 한 능선이 뻗어내려 개운 ‘돌모루’와 ‘산수골’의 경계를 이루고 또한 능선이 ‘산수골’과 ‘속초’의 경계를 이룬다. 
  만대저수지 아래부터 펼쳐진 ‘개운뜰’은 ‘안춘터’, ‘개운절뜰’과 삼현 ‘무네미’를 거쳐 성수리 ‘중뜰’, ‘자패’까지 이어진다. 굽 돌아간 벌판이지만 길이로 따지면 시오리 길에 이르는 광활한 땅이다.  정말 지평선이 보일만큼 넓다.
  ‘돌모루’는 너른 뜰을 가진 만큼 네거리를 이루는 ‘아랫돌모루’와 ‘솔모정’ 그리고 ‘진고개’로 넘는 웃돌모루 ‘양지편’에 집들이 모여 있다.
돌모루 네거리에서 ‘피고개’를 넘어 ‘산수골’로  간다. ‘산수골’은 좋은 샘이 있었다는데 농사짓기에 좋은 샘인지 약수인지는 알 수 없지만 골짜기치고 논이 많은 골이었다.
  큰 산이라면 먹방산 줄기의 능선이 고작이지만 그 사이로 버덩은 논을 뜨고,  비탈에는 밭을 일궜다.  ‘산수골’은 크게 ‘웃산수골’, ‘아랫산수골’로 나누고, 골짜기로는 ‘빙애’, ‘진고개’, ‘논골’, ‘회암 (호암)’, ‘머드레이’로 나눌 수 있다.
  ‘피고개’를 넘어 내려가면 ‘웃산수골’에서 내려오는 개울을 만난다.
   개울 따라 올라가는 길은 없지만 눈 내린 풍경이 아름다워 도랑을 따라 논두렁을 넘고 밭둑서리를 넘으며 골짜기 안으로 들어선다.
  ‘산수골’을 둘러싸고 있는 산들은 나직나직하다. 따라서 고개도 나지막하지만 길다.
  ‘산수골’에서 ‘돌모루’로 넘어다니던 고개는 세 개다. ‘피고개’와 ‘진고개’, 그리고 안막에 있는 ‘움시레이(음시랑) 고개’이다.
  ‘피고개’는 ‘피로고개’라고도 하는데 골짜기가 피리처럼 생겼다고 하여 그렇게 부른다. 그러나 고개가 길어 고개를 걸어 넘어오면 피로를 느낀다고 하여 붙여졌다고도 한다.
  예전에는 큰짐승들이 많이 내려와 무서워 홀로 넘지 못했다고 하는데, 어느 날 한 처녀가 너무 바쁜 일 때문에 한밤중에 이 고개를 넘게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호랑이가 나타나 그 처녀를 잡아 먹었다고 한다.
  그 때 나온 피가 산에 스며들어 땅이 붉다고 하여 피고개라 하였다고 한다. 그런 때문인지 산에는 붉은 진흙이 난다.
  ‘돌모루’에서 ‘피고개’를 오르는 오르막은 짧지만 내리받이는 길다. 피고개를 넘어 내려가다보면 ‘개운절’로 넘어가는 ‘증평고개’가 있다. 
  ‘웃돌모루’ 사람들이 넘어다녔던 고개는 ‘진고개’다. ‘진고개’도 길다. 후동의 ‘안뒷골’이나 ‘삼굿모레이’ 사람들이 이 길로 다녔다. 피고개가 포장 되면서 발길이 뜸해지고 지금은 ‘산수골’에서 오르는 고개 길에 농장이 있다.
  ‘음시레이고개’는 개운 ‘양지건너’와 후동리 ‘삼굿모랭이’에 살았던 사람들이 더러 넘어다녔던 산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머드레이’에 살던 사람들은  ‘큰고개’를 넘어 ‘꽃골’로 많이 다녔다.
  산 밑으로 난 도랑을 따라 웃산수골 진고개 어귀에서 마을안길로 들어섰다. 무당집의 깃발이 펄럭인다.
  우선 눈에 띄는 것이 ‘재피골’ 어귀의 제각이고, 그 위로 보이는 골짜기는 사람이 많이 살았다는 ‘논골’이다. 크고 작은 다랑구지를 이루고 있는데 물이 좋은 샘이 있어 그 물을 받아 논을 붙였다고 한다.
  골안으로 들어가면 ‘머드레이’가기 전에 ‘회암’을 지난다. ‘회(灰)’자가 들어가는 대부분의 지명이 회를 캐던 골이지만 산수골 ‘회암’에서는 회를 캤는지는 알 수 없다. 
  ‘석회’는 석회석을 태워 이산화탄소를 제거하여 얻는 생석회와 생석회에 물을 부어 얻는 소석회를 통틀어 이르는 말로 백회(白灰)·회(灰)라 한다.
  고택의 회벽은 한국 건축의 아름다움과 소박함을 나타내는 건축재였지만 일반적으로 회다지 할 때 많이 썼다.
  예전에는 회를 캐어 불에 굽고 그것을 다시 절구에 넣고 빻아 사용했다고 한다.
  우리의 장례문화에서 회는 꼭 필요했다. 특히 회다지는 천광(시체를 묻을 구덩이를 팜. 또는 그 구덩이)을 하고 그 속에 시신을 넣고 나서 석회를 섞은 흙을 넣고 다지게 된다.
  이때 필요한 것이 회인데 지금이야 시중에서 얼마든지 구입할 수 있지만 예전에는 회를 구하러 회골로 가서 캐오거나 이웃 마을에 가서 캐와야 했다. 
  우리의 장례문화는 일종의 놀이였다. 어린아이가 태어났을 때 기쁜 마음으로 맞이했듯 늙어서 죽을 때도 기쁜 마음으로 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우리 민족의 상여소리와  회다지소리는 슬픈 소리라기보다 망자에 대한 애도와 노동의 호흡을 고르고 흥이었으며 또한 회다지를 하면서 마을의 유대감과 애향심을 갖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강원도의 장례의식요는 크게 <상여소리>와 <회다지 소리>가 있고, 그밖에 장례 전날 밤에 대도둠놀이를 하면서 부르는 <대도둠 소리>, <말 멕이는 소리>, <초 아뢰는 소리>가 있다.
  호상(好喪)일 경우 출상 전날 밤에 벌이는 ‘대도둠놀이’는 상여를 메고 친척집을 돌며 추렴을 하는 원주지역의 놀이가 전해오고 있다.
  정선 지역의 ‘말 멕이는 소리’는 상두꾼들이 출상 전날 밤에 모여서 상가집 마당에 황덕불을 해 놓고 그 주위를 어깨동무를 하고 빙글빙글 돌아가며 불렀다고 한다. 
  ‘초 아뢰는 소리’는 출상 전날 저녁부터 다음날 상여가 떠날 때까지 세 번을 부르는 소리인데, 출상 전날 저녁을 먹은 후에 초초를 아뢰고 자정에 이초를 아뢰며 출상 날 상여에 관을 싣기 전에 삼초를 아뢴다. 
  ‘상여소리’는 상여를 메고 장지로 가면서 하는 소리다. 대부분 긴소리와 자진소리가 구분되어 있다.
   긴소리의 뒷소리 형태는 ‘어호 어호 어이 넘차 어호’ / ‘어호 어호 어이나 갈까 어호’ 등이고, 자진소리는 뒷소리가 보통 ‘어헝 어헝’인데, 길을 빨리 가야 하거나 언덕을 올라갈 때 부른다.
  앞소리 사설로 가장 많이 부르는 것은 회심곡(回心曲)이고, 그 밖에 ‘따복네’의 사설과 비슷한 토속적인 내용의 사설도 있다.
  ‘회다지소리’는 죽은 사람을 금정틀에 묶고 묘를 조성하기 위하여 무덤을 만드는 사람들이 회(灰)를 섞은 흙을 다지면서 부르는 소리로 율동이 곁들여 있다.
  예로부터 우리 조상들은 극락왕생(極樂往生)의 내세관을 갖고 있었기에 주검 앞에 초연할 수 있었고, 장수한 노인의 죽음을 호상(好喪)이라 하여 장례는 망인을 환송하는 뜻에서 해학적인 가사(歌詞)가 포함되기도 한다.
  처음에는 느린 가락으로 시작되나 점차 빨라지며 뒤에는 무덤을 만드는 사람들의 흥을 돋우는 메나리조로 변화되어 간다.
  앞소리꾼은 밖에서 소리를 메기고 광중에는 회다지꾼 여섯명이 횟대를 들고 들어가 발로 다지면서 후렴을 받는다. 보통 세켜 또는 다섯켜를 다진다.
소리는 선소리를 메기는 사람이 따로 밖에 있고,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 소리에 맞추어 "...에헤라 달회야" 하는 후렴을 받는다.
  회다지소리는 상주의 슬픔을 달래주는 한편 무덤을 만드는 사람들의 흥을 돋게 하는 역할을 한다.
  홍천의 회다지 소리는  지역의 대천명산에 따라 선소리를 주는 사람의 사설이 조금씩 다르지만 대체로 횡성의 회다지소리와 비슷하다. 

 

회다지 소리 

에호리 달회야    
(“에 이번 소리는 산신님께 고했습니다. 예!”)
에호리 달회야    
(“에 이번 소리는 외곽손님께 고했습니다. 예!”)
여보시오 지원님들 (1) 
(“에 이번 소리는 광중에(2) 육신령께 고했습니다. 예!”)

이내 소리를 받아를 주오     에호리 달회야
먼데 손님은 듣기가 좋게     에호리 달회야
굼실굼실 다져를 주오     에호리 달회야    
상모맥이를(3) 굽어를 주오     에호리 달회야
차례차례 연차례로       에호리 달회야
일심협력 다져를 주오     에호리 달회야

 

§ 에이허라 달호   -에이허라 달호   -에이허라 달호  
-한 번은 상으로 쓸고  /  -또 한 번은 하로 뽑아  /
-두무치4) 장단에 발 맞추어 / -추근 추근이 다져를 보자   /
-여보시오 계원님들   /-무슨 노래를 불러를 볼까 / 
-회심곡을 아뢰어 볼까   /-초한가를 불러를 볼까   /
-시중잡가를 불러를 볼까  /-시중잡가를 불러를 보자 /
-이 세상에 나온 사람   /-뉘덕으로 태어를 났나   /
-석가여래 제자가 되어   /-삼태성에 복을 타고   /
-칠성님전 명을 빌어   /-아버님전 뼈를 타고 /
-어머님전 살을 얻어 이 세상에 탄생을 했네 /
-한두 살엔 철을 몰라 /-부모님 은혜를 모르다가 /
-사오십이 지난 뒤에 /-부모님 생각이 간절쿠나/
-어제까지 검은 머리/-오늘날에 백발이 되고/
-눈 어둡고 귀 먹으니 /-망령이라 일삼는데 /
-구석 구석 웃는 소래/ -일천간장이 다 녹는다 /
-둘씩 둘씩 마주 서서 /-세발치기를 다져를 보자/
-만승천자6) 진시황이 /-육국을 통일후에   /
-아방궁을 높이 짓고 / -만리장성을 쌓은 연후에/  
-동남동녀 오백인을   /-삼신산에 보내였다   /
-불사약을 구하여서   /-장생불사를 하렸으나  /
-여사래 무덤이요   /-천하일색 양귀비도  /
-매호간에 묻혔으며   /-글 잘하는 이태백과   /
-시 잘 짓는 도연명도   /-일생일사가 분명하여   /
-무주고혼이 되었구나   /-에이허라 달호   /
-에이허라 달호   /
                                     <횡성 회다지 소리 중에서>

 

  마을에서는 선소리꾼이 귀한 대접을 받고 있는데 소리를 줄줄 아는 사람들이 귀한 까닭이다. 따라서 문화원에서는 상여소리, 회다지소리 강좌를 열어 우리의 전통문화를 이어갈 수 있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문득 ‘회암’을 지나면서 떠오른 회심곡 때문에 이야기가 장황해졌다. ‘산수골’로 가는 길은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회암’은 호랑이를 닮은 바위가 있다고  ‘호암’이라고도 하는데 아무리 둘러보고 찾아보아도 없다. 안막으로  ‘구제골’을 지나면 ‘머드레이’다. 대여섯 집이 살았다고 하는데 화전을 하던 시절의 이야기다. 지금은  옛길만 희미하게 남아 있고  숲만 무성하다. 마드레이에서 돌아내려와 재피골 어귀 농가로 들어갔다.

 

  굴뚝에선 연기가 나고 있다. 누가 불을 때는 가보다. 그렇지 않으면 나무보일러에 나무를 잔뜩 우겨넣고 마실을 갔는지 모른다. 대문을 들어서는데 개가 짖는다. 문간의 개가 짖자 대문 안에서도 개가 짖는다. 개 울음이 안개처럼 가득해진다. 기억에 없는 수상한 존재, 아니 움직이는 것에 대한 습관적인 반응이다. 꼬리를 말아 감아올리고 흔들며 짖어댄다. 너는 누구냐 묻는 것이다. 멈칫멈칫한다. 나도 꼬리를 흔들며 짖어대는 저 반신반의 몸태.  돌아선다. 니가 이겼다.  
                                                      - 개의 표정-

  ‘산수골’을 빠져나와 큰길을 따라 내려간다. 커다란 느티나무 집을 지나니 사태고갯마루는 한창 작업 중이고 둔덕으로 인삼밭이 이어진다.
  인삼밭이 펼쳐진 골짜기는 ‘빙애’다. 빙애는 ‘벼랑’의 옛말이다. 참 예쁜 이름이다.
   그 안 골짜기에 정말 벼랑이 있을까? 그 벼랑에 물이 흘러 얼음이 얼었다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그러나 눈이 깊어 들어가지 않았다.
  ‘아랫산수골’에서 속초로 넘는 고개는 ‘사태고개’다. 이 고개로 넘어가면 ‘한갑실’이고, 다리를 건너면 속초초등학교와 동화중학교가 가까웠다. 
  다시 ‘산수골’에서 ‘증평고개’를 넘어 ‘개운절’로 가려했으나 눈이 무릎까지 빠진다. 할 수 없이 ‘돌모루’에서 ‘안춘터’를 지나 ‘개운절’로 들어간다. 개운절로 가는 길은 ‘증평고개’로 넘어가거나 ‘안춘터’로 가는 길 그리고 ‘성수 중뜰’을 거쳐 가는 길과 속초에서 ‘개운다리’를 건너 ‘개운절고개’를 넘어가곤 했다.  
  지금은 고개를 넘어 개운절로 가는 사람이 없다.  대신 ‘안춘터’와 ‘중뜰’로 많이 다닌다.  
  ‘개운절’은 ‘개운절고개’ 밑에 ‘개운사’라는 절이 있었다하여 붙여진 부락으로 크게 ‘안춘터’, ‘모레이’, ‘증평골(너미골)’, ‘안골’ ,‘천령부리’를 아우른다  마을 전체가 양지받이다. 
  ‘증평고개’로 가면 ‘너미골’이다. 고개 너머에 있다고 하는 ‘너미골’은 ‘증평골’이다. ‘증평골’을 따라 내려가면 ‘안춘터’가 나온다.
  이곳 일대는 공동묘지였지만 지금은 돼지농장이 자리 잡고 있다.
  ‘안춘터’는 양지바른 야산이다. 따라서 지금도 묘지가 많다. 또한 앞 개울은 물 좋고 바위너설을 이룬 ‘빗모루’는 마을의 놀이터였다. 여름에는 메기낚시를 하고 아이들은 멱을 감았다.
  더욱이 ‘돌모루 새보’에서 흘러드는 물을 받아 돌리던 물레방아는 처녀 총각들이 연애를 나누던 곳이기도 하다.
  예전에 ‘증평고개’를 넘어 ‘안골’로 몇 번 간적이 있다. ‘안골’에는 오래된 한옥이 있다.
  쟁기를 잘 다루는 박씨의 쟁기질 소리가 바람처럼 귓가에 솔아든다. ‘안골’에서 ‘산수골 지서방네’로 가는 고개는 무당이 살았다고 하여 ‘무당고개’라 했다.   
  물레방아는 ‘천령부리’ 앞뜰에도 있었다. ‘성수 중보’에서 물을 받아 돌리던 물레방아는 경지정리를 하면서 사라졌지만 아직도 퇴수로는 남아있다.
  아이들의 목욕장소로 ‘천령부리’를 돌아 속초로 들어서는 산 밑의 바위도 한몫을 했다.
   눈이 얼어붙어 빙판길이 되었다. 길이 미끄러워 곱절이나 힘들다. 개운절 ‘안골’에서 나와  다리를 건너 성수 ‘당미산뜰’로 들어섰다. 
글·사진 허 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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