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대산(萬垈山)’- 산속의 산이다.
산을 넘고 또 산을 찾아가야 만나는 산이다.
산이 산을 불러 산이라 부른다. ‘오음산’, ‘공작산’, ‘대학산’이 밖으로 둘러서고, ‘비룡산(덕구산)’, ‘응곡산’, ‘먹방산’이 안으로 감싸 안은 산이 ‘만대산’이다.
산속에 갇힌 순한 짐승 같은 산이다.
만대산은 둘이다. 하나는 횡성군 공근면의 ‘만대산(630m)’ 이고, 다른 하나는 홍천군 동면 후동리, 좌운리와 횡성군 공근면 상동리의 모두부치를 이루는 670m의 ‘만대산’이다.
대학산 - 비룡산 - 응곡산 - 만대산 - 오음산으로 이어지는 한강기맥을 종주하는 등산객들에게 ‘만대산’은 송림과 계곡 그리고 암릉(岩陵)이 아름다운 산으로 기억되는 산이다.
그 산의 앞자락이 바로 ‘후동(後洞)’과 ‘개운(開雲)’이다.
삼현 ‘무네미’에서 ‘돌모루’를 거쳐 ‘삼굿모렝이’를 지나 ‘만대저수지’(개운저수지)로 오른 것은 만대산을 한눈에 보려는 심사였지만 산으로 이어지는 능선너머로 살짝 정상을 보여준다.
저수지의 수면은 얼었고 그 위에 눈이 쌓여있다. 아무도 가지 않은 눈얼음판 위로 바람이 불자 눈이 날린다. 쩡쩡 물이 우는 소리가 난다. 얼음이 좀 더 두텁게 얼어붙으면 겨울 강태공들이 빙어낚시를 하러 이곳으로 몰려오리라.
1975년에 준공된 ‘만대저수지’는 저수량 750만톤으로 홍천군에서도 손꼽을 만큼 큰 저수지다. 만대산 계곡의 물을 받아 ‘만대저수지’라 하였다가 ‘개운저수지’로 이름을 바꾸었고, 그 물줄기는 후동리 삼굿모렝이, 장둔지, 안뒷골, 구미말에 닿고, 개운뜰을 다 적시고 개운절까지 닿는다.
‘만대산’은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까닭은 어느 골짜기든 사람을 들이지 않은데 있다. 채미(菜薇)를 먹고 살아야 했던 시절에는 ‘절골’, ‘나무진골’에도 사람이 살았지만 저수지가 준공 되고 나서 ‘만대산’은 산 속의 산으로 감추어졌다. 하지만 깊은 산으로 여겨졌던 이 산도 봄가을이면 여느 산과 다름없이 나물을 뜯고 약초나 버섯을 따는 사람들이 가끔 찾는다.
만대저수지는 크게 세 줄기의 계곡을 갖는다. ‘먹방산’에 닿은 ‘절골’과 ‘만대산’, ‘호덕봉’으로 바로 이어지는 ‘대골’ 그리고 물이 가장 실하고 깊은 ‘큰골’이다. 큰집에 가야 먹을 게 있다고 ‘큰골’로 들어서야 볼 것도 얻을 것도 많다.
‘절골’은 만대산에서 먹방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에 닿으면서 양지 바른 곳이다. 골짜기의 왼쪽 능선은 속초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절골’로 들어서면서 어귀의 ‘양터메기’는 ‘꽃골’로 이어지던 고갯길이었고, 건너편 골짜기는 ‘암자골’이다. 이곳에 암자가 들어선 이후 절골이 되었다고 한다. 아직도 주춧돌과 기와조각이 남아 있다고 하는데 산꾼들은 봄이면 꼭 둘러본다고 한다.
‘자주바위골’은 ‘갈바위골’ 가기 전에 왼쪽으로 들어서게 되는데 골 안막에 호랑이 핏자국 같은 자주색바위가 있다고 한다. 그리고 능선으로 오르는 마지막 골짜기가 바로 ‘쇠망태골’이다. 절골의 물은 ‘쇠망태’ 골짜기에서 시작된다.
‘먹방산’ 줄기로 이어지는 능선을 따라 ‘만대산’ 정상에 올랐다. 정상이라는 표지석도 없고 다만 삼각점이 있다.
등산객들이 이야기하는 삼각점은 이정표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원래는 삼각 측량을 할 때, 측량 기준으로 정한 세 점을 말하고, 그 위치에 표시된 네모난 돌을 말한다. 그런 면에서 만대산은 깃대봉이 되기도 한다.
만대산 정상에서 좌우 멀리 공작산과 오음산이 보인다. 무엇보다도 만대저수지로 이어지는 개운뜰의 풍경이 아름답다.
‘대골’과 ‘큰골’은 만대산에서 ‘호덕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사이에 두고 갈라진다.
‘대골’에는 ‘범본골’이 있다. 나물 뜯으러 갔던 마을 아낙네들이 범을 보고 놀라 자빠졌다고 하여 붙여졌다고 한다. 함께 나물 뜯으러 갔던 한 아낙이 뒤를 보려고 숲 뒤로 갔다가 누가 모래를 끼얹어 놀라 소리치며 쳐다보니 어느새 나무 위로 올라가 앉아있는 범을 보았다고 한다. 그 후 아낙네들 사이에서 이 골짜기는 ‘범본골’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는 범과 관련이 있는 지명들 중에 많이 나오는 이야기가 호랑이(범)가 모래를 끼얹었다는 이야기다. 동물학자들의 말에 따르면 모래를 끼얹은 동물은 호랑이가 아니고 표범이라고 하는데 자신의 영역으로 들어오지 말라는 경고성 행동이라고 한다.
현재 한국산 표범은 호랑이와 마찬가지로 한반도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한반도에서 호랑이와 표범 등 대형 야생동물의 씨가 마르게 된 결정적 계기는 ‘해로운 짐승 제거’를 내세운 일제의 마구잡이 사냥이었다. 그 일에 앞장선 일본인 야마모토의 토벌대가 호랑이 100여마리, 표범 600여마리를 죽였다는 기록이 있으며,〈조선휘보〉1917년 8월호와 <월간 조선〉1926년 1월호, 그리고 ‘1942년판 조선총독부 통계연보’ 등을 보면 1915년부터 42년까지 잡은 한국산 호랑이만도 97마리에 이르고, 현재 멸종위기에 놓인 표범은 624마리, 곰은 1039마리, 늑대는 1396마리가 잡힌 것으로 기록돼 있다.
‘범본골’이 양달이라면 건너편 골짜기는 ‘응달서덕골’이다. 바위서덜에 다래덩굴이 잔뜩 얽혀있다. ‘작은대골’을 지나 막창까지 오르는 계곡은 얼어붙고, ‘질재’로 오르는 길은 언제 사람이 지나갔는지 모를 만큼 숲이 우거졌다. 그러나 후동리 삼굿모렝이의 산꾼 허남선(60. 동면 후동리)씨는 ‘큰골’로 올라 ‘호덕봉’에서 만대산으로 이어지는 바위능선은 볼만하다고 한다.
만대저수지에서 ‘대골’로 오르다가 다시 오른편으로 이어지는 ‘큰골’은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한때 ‘나무진골’로 나무를 하러 가기도 했고, ‘문바우’를 보러 가기도 했던 곳이다. 또 겨울이면 저수지에 빙어낚시를 하러갔다가 운동 삼아 올라가 보기도 했던 곳이기도 하다.
‘큰골’의 오른쪽 능선은 ‘동막골’과 닿아있고 그 능선은 만대산과 호덕봉을 이어준다. 큰골 어귀의 ‘물가래골’과 ‘기신골’을 지나면 ‘나무진골’로 들어서게 되는데 아직도 돌담과 우물터가 남아있고 아름드리 돌배나무가 서있다.
‘나무진골’로 들어서면서 ‘함서방네미꾸러미’를 지나 ‘아갈바위’-‘말발바위’-‘지르매봉’ 뒤 능선으로 오르게 된다. 예나 지금이나 ‘나무진골’은 나무가 빽빽하게 우거져있다. 특히 ‘뒷골’, ‘구미말’, ‘동막골’ 사람들에게는 아주 친숙한 이름이다. 땔나무를 하러 겨울이면 날마다 이곳까지 왔다. 지금 생각하면 참 끔찍한 일이지만 그래도 하루 두 행보씩은 나무를 했다.
‘동막골’에서 ‘나무진골’을 가려면 ‘지르매봉’에서 ‘큰말림’으로 이어지는 등강을 넘어야 한다. ‘말무덤’을 지나 ‘솔모정’에서 ‘동막골드렁골’로 들어가서 다시 ‘장골’로 올라 ‘홀통골’- ‘지시랑골’- ‘설통골’ 안막에서 등강을 넘으면 ‘나무진골’의 ‘함서방네 미꾸러미’다.
그렇지 않으면 ‘즘터골’에서 ‘부드레골’ 막치미에서 등강을 넘고, 또 ‘즘터골’에서 ‘바른골’로 들어가 ‘지르매작골’-‘숯가마골’에서 등강을 넘으면 나무진골의 ‘아갈바위’께가 나온다.
나무는 나무진골 비탈에서 많이 했다. 여기서 지게에 짊어지고 등강으로 올라와 홀통골 끗발에서 나뭇단을 끌어내려 다시 지고 집으로 내려와야 했다.
‘나무진골’은 ‘지르매’봉과 ‘호덕봉’ 사이의 골짜기로 능산을 넘으면 ‘월운 베틀바위’가 있는 ‘큰과(과우)’, ‘작은과(과우)’로 이어지고 그 길은 ‘작은삼마치’로 이어진다.
‘큰골’의 원골은 ‘기신골’을 지나 ‘쇠죽골’로 이어진다. ‘쇠죽골’ 안막은 평평한 둔덕을 이루며 ‘방골’로 이어지며 ‘어둔이’ 터널 어귀로 나온다.
큰골- 쇠죽골로 올라와 호덕봉에서 만대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에는 ‘말통바위’-‘문바위’있다. 이 암릉길은 산행의 묘미를 더해주고, ‘노린재골’, ‘지페골’, ‘문바위골’, ‘귀영소골’ 작은 줄기의 능선이 이어져 내리는 겨울산 풍경을 바라보며 저수지로 내려오는 산행 길은 낚시와 함께 즐길만하다.
‘후동’의 주산은 ‘만대산’이고, 모산은 ‘지르매봉’이다. ‘지르매봉’의 한 능선이 뻗어내려 ‘큰말림’을 일으켜 세워 후동의 ‘뒷골’, ‘동막골’을 이룬다.
코끼리 형상의 ‘큰말림’은 마을의 배산이다.
‘지르매봉’의 다른 한 줄기는 월운과 경계를 이루며 ‘큰논골’을 감싸 안고 ‘관역터(과녁터)’ - ‘임계할미골’을 지나 ‘범에골’ 마루에서 한 능선은 ‘안산’을 이루고, 또한 능선은 ‘월운 퉁퉁바위’쪽으로 이어지며 ‘장성지’와 ‘노장골’, ‘여우박골’을 이루며 ‘노루터’까지 길게 이어진다.
‘노루터’는 월운 개울과 후동 내치기의 두물머리다. 따라서 물이 흔치않았던 동막골에서는 노루터에서 멱 감고 천렵을 가기도 했다.
월운과 경계를 이루는 ‘노루터’ 능선은 야트막한 야산이나 품이 넉넉한 산이다.
‘관역터고개’는 ‘월운 관역터’로 넘던 고개인데 최근에 외지인들이 들어와 전원주택을 짓는다며 많은 소나무들이 실려 나가기도 했다. 월운에서는 ‘관역터’라 부르고, 동막골에서는 ‘과녁터’라 부르는 곳인데 고갯마루에는 바위굴이 있었다.
‘큰농골’에서는 ‘과녁터고개’를 넘어 학교를 다녔는데 굴속에 들어가 놀기도 하고 굴속에서 돌화살촉을 주워 가지고 놀기도 했다고 한다.
‘과녁터고개’를 넘으면 월운 진평 관역터(관향터, 과녁터)이다. ‘과녁터’- ‘진평’- ‘어둔’의 지명이 아마도 군사주군지와 관련이 있어 보인다. 월운과 경계를 이루는 능선의 야산에는 ‘장성지고개’와 마을의 공동묘지, ‘후동고개(월운고개)’가 있다.
하루에 4번씩 버스가 들어오는 후동리 길은 개운 ‘돌모루’에서 ‘솔모정’을 지나 ‘귀미고개(구미고개)’를 넘는데, 마을 어귀에 500년이 넘은 ‘동갈나무’가 있고 맞은편에는 곱게 자란 반송이 있다. 서낭당은 없었지만 마을의 안녕과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제를 드리기도 하고, 집안의 고사를 동갈나무에 빌기도 했다. 어귀에 있어 그늘도 좋아 오며가며 쉬어가던 이 고갯마루의 나무는 ‘홍천군 보호수 30호 금나무’로 지정할 당시에는 축대도 쌓고 안내판도 세웠지만 관리가 제대로 안 돼 고사 위기를 맞고 있다.
후동리에는 거북산이 둘이 있다. 하나는 ‘큰농골’과 ‘작은농골’ 사이의 ‘단봉(구산, 토산)’이고, 또다른 하나는 구미고개를 이루며 노루터 앞쪽의 ‘구미산’이다.
‘지르매봉’에서 ‘큰말림’-‘장둔지고개’-‘구미고개’로 이어지는 능선의 끝자락으로 이 산을 두고 ‘영귀미(詠歸美’)라는 이름이 생겼다고 하기도 하는데 인접한 화촌면 건금리 야시대에서는 영귀미를 지칭하는 곳으로 후동을 말하기도 한다. 구미산은 마을로 들어오는 거북이 형상이고 단봉의 거북이는 마중을 나와 기다리는 거북이 형상이다.
후동리의 중심은 ‘구미말’이다. 마을회관과 경로당 게이트볼장이 있고, 오래된 방앗간이 있다. 마을회관에서 ‘지르매봉’을 바라보며 왼쪽으로는 ‘안뒷골’이 자리하고, 앞쪽으로는 ‘동막골’이 오른쪽 개울을 건너는 ‘갯가뭍에’와 ‘장성지’가 골짜기를 이룬다.
‘안뒷골’과 ‘동막골’ 사이에는 ‘큰말림’ - ‘여우박골’로 이어져 내린 ‘노적봉’이 있고 뒷골을 넘나들던 ‘주논고개’가 있다.
각 부락의 앞뜰은 버덩을 이룬다. 동막골의 ‘큰논골’ ‘작은논골’을 비롯해 ‘주논뜰’과 ‘장성지뜰’ ‘방아다리뜰’ ‘노루터뜰’은 제법 너른 버덩을 이룬다. 장성지에는 물을 대기 위해 판 작은 연못이 셋이 있을 만큼 고논이 많았다.
‘큰말림’의 ‘여우박골’과 ‘까치골’은 비가 와야 물이 흐르는 골이지만 ‘안뒷골’에서 ‘큰말림’으로 이어지는 골짜기이고, ‘뒷골’ 한가운데를 흐르는 도랑이 동막골 개울과 만나는 곳에는 방아처럼 생겼다하여 ‘방아다리께’라고 한다.
‘큰논골’과 ‘작은논골’로 갈라지는 어귀에는 ‘말무덤’이 있고, ‘큰논골’과 ‘작은논골’ 사이에 단봉이 거북이처럼 엎드려 있다.
‘작은논골’에서 고개를 넘으면 마을에서 관리하는 ‘즘토골저수지’가 나온다. ‘부드랫골’과 ‘바른골’에서 흘러드는 물을 가둔 이 저수지는 동막골의 젖줄이기도 하다. ‘부드랫골’-‘평풍바위골’은 ‘호덕봉’에 닿고, ‘바른골’에서 ‘평풍바위골’-‘지르매봉’으로 오르고, ‘지르메작골’- ‘숯가마골’ 등강을 넘어 ‘나무진골’로 넘어다녔고, ‘지르매작골’-‘영사골’- ‘지르매봉’으로 오르기도 했다. ‘지르매봉’은 오음산과 함께 마을에서 한눈에 들어오는 산으로 산세가 아름답다. 그러나 군사격장이 들어오면서 인적이 끊긴 산이 되었다.
‘안뒷골’과 ‘삼굿모랭이’ 사이에는 ‘장둔지고개’가 있고 고개를 넘으면 ‘장둔지’이다. 개운에서 만대저수지 오르기 전 다리를 건너 오른쪽 버덩이다. 저수지 아래는 ‘삼굿모랭이’인데, 옛날에 이곳에서 삼굿을 많아 했다고 하여 붙여졌다. 삼굿은 삼의 껍질을 벗기기 위하여 삼을 찌는 구덩이나 솥을 말하며, 이곳에서 삼굿을 했다고 한다.
‘산굿모렝이’에서 ‘드렁골’을 넘으면 ‘동막골 드렁골’이다. ‘큰말림’을 중심으로 ‘드렁골고개’를 넘으면 마을을 한 바퀴 돌아보게 된다.
눈 감고도 훤히 보이는 마을 안길과 산과 개울이 나를 키웠다. 감자꽃이 피는 봄이면 나는 늘 도망가고 싶었지만 결국 ‘영귀미’로 돌아왔다.

 

산 너머에 대하여 묻지 않았다
하늘과 산노을을 바라보며 산 너머 또 산이 있겠지
지게를 지며 답하고 있었다
어디쯤 도시가 있고 텔레비에 비추는 정치가 있으며
그 먼 나라를 꿈꾸는 사람들이 모여
눈물보다 투명한 이슬이 되는지
마냥 걸음으로 답하고 있었다
말보다 빠른 손길로 다듬어지는 투박한 화전밭에
땅속 깊이 묻어 두었던 무던한 가슴 가슴들
오늘은 땅 속 깊이 감자가 굵어
뜨겁게 만나는 안식의 저녁상에서도
결코 산 너머에 대하여 묻지 않았다

허림의 < 감자꽃 >

 

150여년 전 백설재(白雪齋) 선생도 고향으로 돌아와 시를 남겼다.

 

故園只在詠歸村 이제야 고향 영귀촌에 돌아왔네
半日行行可到門 반나절을 걷고 걸어 문 앞에 도착했네
萬垈郊坪靑草合 만대 밖의 뜰은 푸른 초원을 이루고
五音山立白雲繁 우뚝 선 오음산엔 흰 구름이 이네
兒孫撫頂非難事 아이들 다독여주는 일은 어렵지 않나
第侄開懷定機番 제질들에게 마음 터놓고 몇 번인가 말하려했던가
徒步登程誠未易 고향에 자주 오는 게 쉽지 않아
只將初計向人言 다만 처음 생각했던 일들만 이야기 했네

백설재(白雪齋) -故園(고원)

백설재 선생이 바라본 고원의 풍경은 지금도 변함없다. 그 삶의 서정과 정서는 지금도 애련하고 아슴하다. 그러나 고향의 하늘을 바라보는 눈은 왜 이리 짜디짠 바다인가?
그게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리라.
‘구미고개’를 넘으며 마을을 다시 돌아본다.
늘 거기 어머니가 계시는 곳. 참 조용하고 따듯하다.
글·사진 허 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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