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음산’은 절로 이름이 붙여진 게 아니다.
울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기도 하다. ‘공주터’에서 대를 이어 살고 있는 ‘신현철씨(74, 월운리 공주터)는 오음산의 울음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신현철씨가 직접 들은 오음산의 울음소리는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일 년 전이었다고 한다. 이른 아침이었는데 박무가 약간 낀 바람도 없는 날이었다고 한다. 아침 열시쯤 이었다고 가억하며 그 울음소리는 ‘쉬-- 바람이 불어가는 소리’였다고 한다.
이상도하다 생각되어 어른들께 여쭈니 ‘산이 우는 소리다. 나도 들었다. 산이 울면 큰 재앙이 온다는데 무슨 일이 나겠구먼.’ 하셨는데 그 후 일 년이 안 되어 한국 전쟁이 일어났다고 한다.
오음산은 을사 늑약이 체결되던 해도 울었다고 한다.
아마도 오음산의 울음은 우리에게 닥칠 재앙을 몸으로 말해준 영험한 산이라고 할 수 있다.
‘오음산’은 큰 산이다.
많은 능선과 능선 사이로 골짜기를 이루고 마을을 거느린다.
홍천 동면 월운 ‘갬둔지’, ‘공주터’ 삼마치 ‘원터’, ‘싸리재’와 횡성 창봉 ‘사기전골’, ‘어둔이’가 오음산과 닿아있는 골짜기 마을이고, ‘방량골’, ‘삼현’, ‘성수’, ‘삼마치’, ‘높은터’ 그리고 ‘유치리’, ‘시동’, ‘신대리’가 오음산자락의 마을들이다.
이번 기행은 오음산의 한 능선이 홍천읍내로 향하면서 골짜기를 이루고 또 그 안에 품은 마을을 찾아간다.
‘방량(放良)’과 ‘삼현(三峴)’이다.
개운에서 월운으로 들어서다가 방량 ‘족돌바위’에서 ‘수리네미’를 넘어 ‘방량골’로 들어설 수도 있지만 일부러 삼마치 ‘양지말’에서 ‘방량골’로 넘는다. 그 까닭은 오음산의 한줄기를 아우르는 마을의 모습을 보기위해서다.
오음산에 올라가 바라본 능선은 거목의 뿌리 같았다. 등산객들이 말하는 한강기맥의 굵은 능선이 서쪽으로 이어지고 그 사이로 홍천강이 휘감아 돌아 흘렀다.
‘공주터’는 오음산 ‘매봉’에서 ‘우물등’ - ‘진등’으로 이어져 내려와 ‘석봉’을 이루는 능선과 ‘매봉’의 한줄기가 ‘화채봉’을 이루고 ‘화채봉’에서‘ 싸리재골’로 이어져 내려오다 ‘사시락골’을 이루며 감싸 앉은 능선이다.
이 능선은 다시 ‘방량골’을 이루고 ‘방어재고개’에서 서쪽으로 뻗어내려 ‘삼현’을 감싸며 홍천 ‘남산’을 이룬다. ‘삼현’을 감싸 안으면서 ‘배터’를 이루고 또 하나는 성수리 깃골(집골)을 품는다.
‘삼현(삼재)’을 감싸 안고 이룬 ‘남산’은 다시 동으로 ‘오룡산’과 ‘성목산’을 이룬다.
‘성목산’은 성전(재앞, 자패) 뒷산으로 바로 이괄과 관련 있는 이괄바위, 이괄산성 등 많은 설화를 간직하고 있다.
각설하고 삼마치 ‘양지말’에서 ‘방어재’를 넘어 ‘방량골’로 넘어들면서 초등학교시절을 떠올렸다.
월운초등학교에서는 소풍 장소가 ‘비둑치’ 어귀의 솔밭 아니면 ‘방어재’를 넘어 ‘삼마치 약수터’였다. 소풍 한번 가려면 새벽부터 부산을 떨어야 했다.
또한 홍천 관내 체육대회에 시합을 가려면 이 고개를 넘어 ‘삼마치’에서 버스를 타고 참가해야했다. 아침 일찍 뛰면서 부리나케 고개를 넘어 버스를 타고 읍내 운동장에 도착하면 다리에 알이 배 실력을 발휘하기 힘들었다. 그래도 몇몇 친구들이 입상하기도 했다.
그런 기억이 남아있는 ‘방어재’는 지금 아스콘 포장이 되어 있다.
‘방어재’는 방어사또가 잠시 머물렀다하여 붙여진 고개다. 원래 방어재가 있는 골짜기는 옥골(옥토골)로 들어가서 넘는 고개였다.
삼마치에서 고개를 넘으면 홍천군산림조합에서 운영하는 톱밥공장이 있고 그 아래로 마을사람들이 산신께 제를 올리던 ‘산지당골’이 있다.
‘산지당골’ 아래가 ‘옥토골’이다.
맞은편에는 ‘검둥애고개’가 ‘장전평 옥류동’ 검둥애골로 이어지고, 방량골의 물줄기가 시작되는 ‘말림골’을 따라 올라가면 ‘화채봉’으로 이어진다. ‘미골’과 ‘밤재골’ 사이에는 작은 고샅길이 나있었는데 ‘서낭터’다.
‘다리골’,‘고양쥐박골’의 작은 골짜기를 품은 ‘높은터’는 안막에 둔지를 이루어 몇 집이 살고있고, 공주터 사람들은 ‘목재이’를 넘어 읍내 장보러 다니기도 했다.
‘방량골’은 버덩이라고는 할 만한 뜰은 별로 없는 산골이다. 자랑이라면 ‘골말’과 등을 맞대고 있는 ‘안터봉(숫돌고개)’에서 질 좋은 숫돌이 나왔다는 것이 고작이다. 집집마다 하나씩은 장만해 두기도 하고 장에 내다 팔기도 했다고 한다.
‘골말’과 넘나들던 고개를 ‘불탄고개’라고도 한다.
고속도로 교각 아래에 마련된 게이트볼장에선 커다란 드럼통으로 만든 난로 불을 피워 추위를 녹이면서 마을 노부(老父)들이 모여 ‘게이트볼(Gateball) ’을 치고 있다.
게이트볼은 당구와 골프를 섞어놓은 듯하다. 당구공 같은 흰색과 붉은색의 공을 사용하고 자신의 공을 쳐서 다른 공을 맞히는 것은 당구와 비슷하고, 엄지를 감싸며 스텍을 잡는 방법은 골프채를 쥘 때와 비슷하다. 게이트볼은 13세기경 프랑스 남부 농민들이 양치기가 쓰는 끝이 굽은 막대기로 공을 쳐서 버드나무 가지로 만든 문을 통과시키는 페일-메일(Paille maille)에서 유래되었고 이 놀이가 발전하여 크로케가 되었다. 그 후 2차 세계대전 직후 일본의 홋카이도(北海島:북해도)에 살던 스즈키 가즈노부(鈴木和伸)란 사람이 1947년 크로케 경기에서 힌트를 얻어 나무로 스틱과 공을 만들어 어린이들의 야외 공놀이로"게이트볼"이란 경기를 처음으로 고안해 냈다. 우리나라에는 1982년경 일본인 관광객에 의해 첫선을 보였으며 1983년에 한국게이트볼협회 등이 생기면서 보급되었다.
주로 마을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곳도 바로 게이트볼 장이다. 최근에는 마을마다 시설이 잘 되어 있어 늘 화기애애하다.
길을 따라 내려가다가 왼편으로 ‘대골’과 ‘지당골’, ‘대추나무골’을 이루는 야트막한 봉우리들이 ‘삼현뜰’로 이어지고 오른쪽으로 올라서면 ‘수리네미(수리너미)’고개다. 수리네미는 원래 ‘골말’로 넘나들던 고개였는데 고속도로를 사이에 두고 한 길은 ‘족돌바위’로, 다른 한 길은 ‘골말’로 바로 넘어가는 고개가 났다. 수리너미고개에는 물레방아가 있었다. 삼현에도 물레방아가 있었지만 고개 너머 이곳에서 방아를 찧었다.
난로에 몸을 녹이고 ‘삼현’으로 내려간다.
방량골에서 삼현으로 이어지는 길은 ‘잣남배기 백촌(柏村)’이다. 삼현쪽에서 바라보면 방량골은 삼현의 한 골짜기로 여겨지며, 그 골짜기에서 흐르는 실개천이 비로소 삼현 양지말의 뜰을 이룬다.
삼현리는 크게 ‘무네미’, ‘양지말’, ‘잣남배기’, ‘배터’, ‘무녕골’, ‘스승골’을 아우르는 작은 마을이다. 산이 에두른 마을이라 고개를 넘지 않으면 대처로 나갈 수가 없다. 따라서 대처로 나가는 큰 고개가 셋이 있다하여 ‘삼재’라 부르기도 한다. 그 ‘삼재’는 거느리재(거느름재,건들재), 긴삼재(진삼재), 삼재(웃삼재)라는 세 고개다. 그러나 삼재에는 헐떡고개 상재 무네미고개 무당고개 등 많은 고개가 있다.
삼현리의 삼재를 찾아나서는 것만으로도 재미있는 기행이 되리라.
내 기억에 ‘삼재’하면 ‘남궁할아버지(일명 삼재미치개)’란 어른이 생각난다. 머리가 얼마나 비상한지 인근 동네의 어른들 생일이며 제사 등을 빠짐없이 기억하고 있을 정도였다. 특히 회갑연에는 부르지 않아도 한자리 하고 앉아 음식이며 술을 마셨다. 술기운이 돌면 즉석에서 회갑연 축시를 읊기도 했는데, 문제는 술만 들어가면 미친 듯이 입담을 퍼붓는 등 잔치집 분위기가 난망스럽기도 했다.
남궁할아버지를 생각하며 경로당을 지나 ‘배터’ 어귀까지 내려왔다. ‘잣남배기’와 ‘웃삼재’, ‘배터’가 삼거리를 이루며 너른 버덩이 펼쳐지는데 이곳이 삼현리 ‘양지말’이다. 그 중 배터어귀의 버덩을 ‘삼재버덩’이라고 하는데 그 이유는 골이 깊고 물이 흔하기 때문이다.
배터 어귀는 ‘서낭당’이다. 그러나 당집은 없고 산 밑에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의 장승과 솟대 3개가 함께 서있다. 마을에서는 매년 정월 대보름날 동네의 풍년과 잡귀를 물리치는 거릿재를 올린다.
서낭당에서 배터로 들어선다. ‘배터’는 배나무가 많아 ‘이대촌(梨垈村)’이라고도 하는데 골 안막의 ‘큰골’과 ‘절골’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가둔 ‘삼현저수지’가 있다. 또 배터 어귀의 ‘석장골’에도 작은 저수지가 있다. 석장골에서 깃골로 넘는 고개는 ‘상재’였다.
저수지에서 왼쪽으로 이어지는 골짜기는 큰골인데 물이 흔하다하여 ‘물안골’이라 하고, 오른편으로 이어지는 골짜기는 ‘절골’이다. ‘절골’에서 홍천 연봉으로 넘던 고개가 ‘거느리재(건들재)’다.
저수지아래 ‘왯둔지’는 기와를 굽던 곳이고 아래 골자기는 ‘지새울’이다. ‘안골’은 지새울 안막이다. 지새울 어귀에는 우리꽃 농원이 있다.
‘안골’에서 고개를 넘으면 ‘웃삼재’가 나온다.
지새울 아래의 작은 골짜기는 ‘뱃골고개’로 ‘아래삼재’로 넘던 길이다. 지새울을 따라 안골로 들어서서 웃삼재로 올라갔다.
‘웃삼재’는 ‘스승골(시신골’)과 논골이 있고, ‘장전평’으로 이어지는 ‘웃삼재고개’와 ‘진삼재고개’가 있다.
‘진삼재’로 넘으면 장전초등학교 뒷골짜기가 나오고 ‘웃삼재고개’로 넘으면 ‘검둥애골’이 나온다.
‘스승골’은 바로 ‘남궁할아버지’가 살던 골짜기다.
웃삼재에서 내려오다가 농로를 따라 개울을 건너면 ‘무녕골(무녀울)’이고, ‘헐떡고개’를 넘어 ‘방량골’을 다녀오기도 했다.
무녕골로 들어서는 길 어귀에 ‘삼현리 물통방아놀이’의 전승자인 신양식씨 댁이 있다. 삼현하면 물통방아놀이를 빼놓을 수 없다. 그러나 삼현에 물통방아는 없다. 그럼에도 삼현리 물통방아놀이라 부르는 것은 군의원을 지낸 신양식씨의 노력으로 전승되었기 때문이다. 원래 물통방아는 홍천군 화촌면 구성포리와 동면 노천리에서 설치되었던 것을 발굴 재현한 놀이이다. 비교적 물이 적은 지역에다 설치했다고 하는데 지금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일부 타 지방에서는 통물방아 또는 통방아라고 부르고 있으며 홍천지방에서는 물통방아라고 부르고 있다.
방아의 구조는 디딜방아와 비슷하다. 흐르는 물을 귀새 물통에 받아 방아를 찧게 되기 때문에 낮이나 밤이나 쉬지 않고 방아를 찧을 수 있었다.
방아를 찧는 일이야 아낙네들의 몫이었지만 물통방아를 놓는 일은 남자들의 몫이었다. 산에서 나무를 베어 나르는 일(운목)과 귀새를 파고 물통방아를 깎고 설치하는 일 그리고 물대는 일은 남자들의 몫이었다.
이 일은 마을의 큰 행사였고 마을주민 모두 힘을 합쳐야 하는 일이었다. 따라서 신명나게 소리(노래)도 하고 흥을 돋우면서 동네잔치를 벌이던 마을 행사가 전승문화놀이로 재연된 것이다.
당시 공무원이었던 신양식씨는 자료를 모으고 소리(노래)를 채록하고 배우는 등 심혈을 기울인 끝에 1986년 제4회 강원 민속경연대회에서 우수상을 수상하게 된다.
물통방아를 놓는 힘든 과정의 공허함을 메우는 것은 노랫가락이다. 그 노랫가락에는 우리네 삶의 한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지게목발 곰방대를 / 두디릴 땔 나무하러가네
어떤 사람은 팔자 좋아 / 사용 연경 달아도
날 같은 사람은 / 날만 새면 지게지고
어느 누가 날 말리리 / 우리엄마가 날 말리리
우리엄마가 날 날 적에 / 삼신단에 빌 때에는
묵고 놀고 묵고 자고 빌었더니 / 내 팔자가 왜 이렇노
공작산 까마귀야 까마귀야
까마귀 겉이야 검지마는 / 마음속도 검을소냐
이산저산 양산을 다 댕겨도
까욱까욱 우는 소리 / 슬프게도 넘어간다
그야 우리소리 / 미역 검다고 울지마라
속속들이 검을소냐 / 한탄 말고 견디그라
-물통방아놀이 중에서 나무하는 소리-

산에 들어가 나무를 베는 과정에서 부르는 나무하는 소리는 한마디로 신세타령이다. 그러나 더 힘든 나무를 운반하는 과정은 다분히 낙천적인 가락으로 풀어내고 있다.
과정마다 노래로 풀어내면서 가난과 고단한 삶을 지혜와 슬기로 견뎌낸 우리 어머니 아버지들의 삶을 엿볼 수 있다. 그것이 한낱 꿈이면서도 현실이고 현실이면서 다시 꿈꾸어야하는 삶이었으리니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래서 풍년은 더욱 간절했으리라.

춘삼월엔 화전놀이가고
하사월에엔 덤불놀이가자
오뉴월에는 말복놀이가고
구시월에는 단풍놀이가자
고대광실 높은 집을 짓고
영화를 누려보자
동지섣달에는 설경구경가자
-풍년가에서 부분 발췌-

한때 그렇게 하지 않으면 먹고살기 힘들었던 시절이 있었다. 이제 좀 살만하다고 그 모든 것을 몰라라하고 살아왔던 시절도 있었지만 지금에선 놀이로나마 그 문화를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이다.
그렇게 살라는 것이 아니다. 대신 우리 삶의 뿌리가 닿아있는 삶을 반추해보고, 그 삶을 통해서 자신과 민족의 정체성을 정립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역사와 전통문화를 가진 민족의 힘이기 때문이다.
신양식씨의 노래가가락을 들으면서 내 몸과 마음이 덩실거리며 어깨춤이 절로 들썩인다.
‘방량골’과 ‘배터’, ‘스승골’에서 흘러내린 실개천이 ‘양지말’에서 만나 ‘숫골말’로 빠져나가고, ‘황새머리’를 지나 ‘무네미’로 들어섰다.
둔덕을 이루는 무네미는 ‘장량골’이 월운천으로 흘러내리고, ‘호랑박골’을 지나 ‘상촌(웃말)’로 들어서서 ‘무당고개’를 넘으면 방량골 어귀가 나온다.
‘무네미고개’를 넘어 개운 ‘돌모루’에서 ‘만대산(萬垈山)’에서 시작되는 물줄기 따라 ‘만대저수지(개운저수지)’까지 올랐다.
글·사진 허 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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