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가 깊다. 정오가 되도록 안개가 걷히지 않는다.
  겨울 안개 속을 나서는 길은 신생의 빛으로 가득하다. 나뭇가지마다 눈꽃을 피운다. 올겨울 들어 자주 보는 겨울 풍경이다. 
  며칠 전에 찾아뵙겠다고 전화를 드렸던 월운 ‘공주터’ 신현철(74.월운리 공주터)씨 댁을 찾았다. 안개가 걷히기를 기다려 좀 늦게 ‘오룡터널’을 지나 ‘자패(재앞)’를 지나니 ‘오음산’이 안개에 뿌옇게 보인다. ‘집골(깃골)’ - ‘개운’을 지나 ‘월운초등학교(속초초등학교월운분교장)’ 못 미쳐 오른편 ‘공주터’로 들어섰다. 
  개울을 건너니 중앙고속도로가 마을 어귀를 관통하여 ‘갬둔지’-‘절골’을 지나 ‘밤골고개’ 어귀에서 터널로 들어선다. 예전에는 ‘뱀골고개’를 너머 ‘어둔이’로 다니기도 했다. 
  공주터 어귀에서 ‘방량 골말’로 가는 길과 ‘석봉안’으로 이어지는 농로가 나있다. 공주터 초입인 ‘새말’이다. 새말을 지나면서 오른편쪽으로 오르면 ‘승지골’이다.
  ‘승지골’은 ‘남궁씨 승지공파’가 홍천 영귀미현에 내려와  터를 잡은 골짜기다. 승지공파의 시조가 되는 분은 벼슬이 도승지에 이르렀으며, 왕의 사위인 부마였는데, 공주가 살았다(공주가 이곳에서 피난하였다) 하여 마을은 공주터가 되었고, 승지가 살았다 하여 ‘승지골’로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언제 이곳으로 내려 왔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승지골’에서 ‘사시락골’로 넘는 고개에는 ‘황구분터’라고 하는 곳이 있다. 이곳에는 아무런 비문도 없는 비석이 서 있었는데 마을에선 ‘개비석’이라고 하였다.
  -옛날 어느 나그네가 개를 데리고 고개를 넘다가 해가 저물어 모닥불을 피워놓고 잠이 들었다. 모닥불이 점점 번저 주인에게로 다가오자 개는 골짜기 흐르는 물에 몸을 적셔 주인 옆으로 번지는 불을 밤새 끄다가 지쳐 죽고 말았다. 때늦게 눈을 떠 보니 개가 온몸에 상처투성이로 죽어있는 것을 보고 개의 애틋한 죽음을 기리기 위해 그 자리에 비석을 세웠다-고 한다. 
  이 비석은 후에 ‘관역터’ 사격장 어귀의 길가에 서있었는데 지금은 사라졌다고 한다.
  개가 사람보다 낫다는 말이 틀린 말이 아닌듯하다.
  우리나라에는 죽음으로서 주인을 구한 개 이야기가 많이 전해진다.
  가장 오래된 의견(義犬)이야기는 최자의 <보한집>에 전하는 <오수(獒樹)의 의견(義犬)>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여러 고문헌에도 실려 있으며, 일제하에서는 <조선어독본> 초등학교(소학교) 도덕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 
  또한 <견분곡(犬墳曲)>이라는 악곡이 만들어져 노래로 불려지기도 하였다고 한다.
현재 전북 임실군 둔남면 오수리의 원동산에는 의견비(義犬碑)와 의견 동상이 지방민속자료로 보존되고 있으며, 경북 선산군 해평면 낙산에 있는 의구비(義狗碑)에 얽힌 이야기는 조선 영조 때 목판본으로 간행한 <의열도(義烈圖)>에 <의구도(義狗圖)>로 남아 있다.
또 ‘황구분터’에는 ‘흔들바위’가 있다. 설악산 흔들바위보다 크기는 좀 작지만 누가 흔들어도 움직인다고 한다. 흔들바위를 찾아 ‘황구분터’로 올랐지만 안막에 철망을 치고 문을 자물쇠로 걸어 닫아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승지골’에서 나와 산굽이를 돌아 왼편쪽으로 이어지는 골짜기는 ‘수작골’이다. ‘수작골’은 물이 귀한 천수답이지만 드문드문 수(藪)가 있어 고논(수렁)을 이룬다.
  -옛날에 노루가 고래실을 지나다가 빠졌다고 한다. 노루는 헤어나려고 발버둥을 쳤지만 수렁에 깊이 빠져 모습을 감추었다고 한다. 그런데 며칠 후 월운, 후동, 개운이 경계를 이루는 논 가운데서 노루가 나왔다고 한다. 그 후 노루가 나온 터라하여 그곳을 ‘노루터’라고 부르고 있다. 그 뜰은 지금 너른 뜰이 되었다.
  ‘수작골’ 안막에는 서낭당이 있었고 그때 서있던 당목인 소나무가 아직도 서 있다.
  ‘수작골’에서 ‘갬둔지’로 넘는 길은 포장되어있으며, 또 ‘절골’에서 넘는 고개는 ‘수작골’ 안막으로 들어서게 되는데  ‘절네미(절너머)’라 불렀다.
  '오음산 매봉'에서 '석봉안'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진등'이라 하는데 마을사람들은 이 '진등'을 타고 '오음산 매봉'으로 올라다녔다. 특히 '진등'을 따라 오르다보면 '웃물등'이 나오는데 산등강 한가운데 절구처럼 움푹 파인 곳에서 약물이 나온다.   
  '공주터'에는 '수작골'이 이루는 '수작뜰'과 '느라뜰(於野平)'이 있다. '느라뜰'은  '큰시골', '작은시골'로 이어지는 둔덕을 두고 말하는데 그 어귀에 '서정(書亭) 이 있었다. 지금도 소나무가 그늘을 드리우고 서있다. 신현철씨 댁은 바로 ‘느라뜰 서정’께 였다. 
  서정이란 서당보다 작지만 오다가다 쉬어가기도하고 마을의 대소사를 논의하기도 하면서 동네 아이들이 모여 공부하기도 하는 다목적 정자다.
  ‘웃물등’에 대한 자랑이 대단하다. 
  ‘싸리재’로 넘는 길을 따라 오르다보면 오른편으로 ‘황구불터’와 욕고개가 있고, 왼편으로 ‘큰숨은골(소들어몰은골)’, ‘시시락골’, ‘논서너밭골’이 ‘배너미(배넴이)’로 이어지는데 특히 ‘시시락골’에는 작은 폭포가 있다.
  ‘오음산’에 올랐다가 북쪽능선으로 들어서 내려오다 보면 ‘공주터’가 나오는데 등산객들은 이 능선 길을 ‘싸리나무군락지’라 부른다.
  ‘싸리나무’는 부처님의 사리보관 상자를 사리나무로 만들었는데 사리가 <싸리나무>로 변한 것이라고 한다.  또 그 옛날에 과거를 보고 장원급제를 하고나면 이 싸리나무 앞에서 큰절을 했다고 하는데 싸리나무로 만든 회초리롤 맞으면서 공부를 하여 성공을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싸리나무로 만든 회초리는 따끔한 맛이 있으면서도 멍이 덜 들어서 회초리로 많이 사용했다고 한다.
싸리나무는 빗자루, 회초리, 삼태기, 광주리, 지게소쿠리는 물론 전이나 빈대떡 붙일 때 꼬치로, 곳감 꼬치로 쓰였고, 윷놀이 할 때 '윷가치'로 다듬어 쓰기도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그 옛날 병아리 키우는 섶, 오줌 싼 아이들이 소금 얻으러 갈 때 쓰던 키, 초가집 사립문도 싸리로 만들었다. 
  최근에는 싸리나무의 효능이 알려지면서 식용으로도 쓰인다. 골다공증이나 관절염에는 씨와 뿌리, 껍질을 달여먹고, 또 싸리나무 껍질을 달여서 물에 타서 쓰면 머릿결도 좋고 피부에도 좋아 샴푸대용으로 쓰는 사람도 많다.
  한방에서는 호지자(胡枝子)라 한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늦여름에 피는 싸리꽃향기는  가을향기의 일품이다. 그 향긋한 향기의 꽃차를 내년에는 준비해두어야겠다.
  ‘사시락골’에서 능선을 넘으면 홍천읍 삼마치 ‘싸리재골’이다. 지금은 이 고개를 넘는 사람들이 별로 없지만 예전에는 월운에서 삼마치에서 차를 타러가기 위해 많이 넘어다녔다. 따라서 ‘홍천읍내’를 가는 지름길이기도 했던 이 고개 이름이 ‘욕고개’이다. 지금보다 더 무성한 숲이 우거졌던 시절 혼자 이 고개를 넘던 여인이 갑자기 나타난 남정네에게 욕을 당한 뒤 나무에 목을 매 죽었다하여 ‘욕고개’라 하게 되었다 한다.
  ‘싸리재골’은  ‘오음산’ - ‘화채봉’으로 이어지는 골자기로 골짜기를 따라 내려가면 ‘성덕사’란 비구니 절이 있고 ‘삼마치 양지말’이 나온다.  ‘화채봉’으로 이어져 내려오는 능선에는 ‘방어재’가 있어 ‘삼마치 양지말’과 ‘방량골’을 이어주고, ‘방량골’을 따라 내려오면 홍천읍내 남산 뒤편 마을인 ‘삼현’이다. 
  공주터에서 내려와 월운초등학교로 들어갔다. 아이들이 배드민턴을 치고 있다.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교가를 부르자 아이들이 따라 부른다.

오음산의 높은 정기 장엄하다 새아침
민족의 향기로운 꽃이 피려니
나날이 배워가는 반만년 혈통
우리들은 뭉친다 빛나거라 월운교

  노간주나무 울타리가 정겹다. 그때 함께 다녔던 아이들이 벌써 오십 줄에 들어서고 있다니! 
  노간주나무 사이로 뚫려있는 구멍은 여전하다. 지각이다 싶으면 그 구멍으로 많이도 빠져 드나들었다. 
학교를 중심으로 한 마을은 ‘담을너머’다. ‘담을너머’에서 ‘월운(후동)고개’를 넘으면 ‘후동리 장성지’다. 고갯마루에는 공동묘지가 있는데 비오는 날 학교를 마치고 고개를 넘어 집으로 오다가 여자아이들이 오면  풀숲에 숨어 ‘귀신 나온다’ 소리치며 놀려주기도 했다. 
  ‘월운초등학교’는 원래 ‘양지말’ 월운 방앗간 뒤 버덩에 설립되었다. 1939년 2월4일 속초심상소학교 부설 간이학교로 인가를 받아 1943년 7월1일 월운공립국민학교로 개교하여 1949년 07월25일 제1회 졸업 졸업생 34명을 배출하였다.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학교가 일부 소실되어 지금의 자리로 옮겨 짓는다. 그 후 이농현상으로 아동수가 급격히 감소하면서 1999년 9월1일 속초초등학교월운분교장으로 격하되었다.
  한때는 탁구로 명성을 날리기도 했으며, 최근에는 리코더연주와 글짓기 그리고 어린이들이 만든 ‘월운리인삼밭 대소동’이란 영화로 명성을 떨쳤다. 연출, 조명 모두 아이들의 고사리 손으로 이루어지고, 세트는 마을 전체, 마을 주민들이 배우로 총출동하여 만든 이 영화는 월운리를 영화마을로 만들었다. 
  2009년 가을에 열린 ‘홍천아시아다문화영화제’는 국내에 거주하고 있는 이주여성들의 삶과 그들의 문화를 알리고 다문화가족에 대한 인식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홍천의 이주여성들이 직접 영화제를 기획하고, 프로그래머로 참여하여 자국의 영화들을 직접 선정, 번역, 소개하는 등 차별화된 특별한 영화제로 각광을 받았다. 
  홍천 이주여성과 월운리 주민들이 지난 2008년부터 참여하여 만든 장편영화 ‘금광 속의 송아지(감독 신지승)’를 국내 최초로 선보였으며, 각국의 문화를 이해하는 소통의 장이 마련되기도 했다. 
  월운초등학교는 영화 속의 주인공들이 다니는 학교다.
  교문을 나서서 방량으로 들어섰다. 방량에서 학교를 다녔던 봉형이와 근원이 재수 희규 또 누가 있었지? 얼굴 떠올리며 ‘골말’로 들어섰다. 
  ‘방량’은 ‘골말’과 ‘족돌바위’, ‘방량골’을 아우른다. ‘골말’과 ‘족돌바위’는 월운천을 따라 부락을 이루고, ‘방량골’은 ‘삼현개울’로 물이 흘러든다. 그 경계는 ‘수리너미재’다. 따라서 ‘방량골’은 ‘삼현’과 아울러 돌아보기로 하고  오늘은 월운천을 중심으로 돌아보기로 했다.
  ‘수리너미재’에서 돌아 서서 ‘골말’로 들어서는데 어귀에 비석이 서있다.
  區長趙炳學(구장조병학)의 기념비이다. 한자의 해독이 어려워 사진만 찍고 ‘족돌바위’로 내려왔다. 
  방량하면 ‘족돌바위’가 우선 떠오른다. 생김새가 족두리 같다하여 붙여졌는데 어딘지 가물가물하다. 지나가는 아주머니께 ‘족돌바위’가 어디냐 물었지만 이사 온 지 얼마 안 돼 모른다며 오래 산 분을 찾아 물어보라 한다.
  할 수 없이 초등학교 친구 봉형이네 집으로 발길을 옮기는데 담배 곳간이 있는 집에서 아주머니가 나온다. 외양간에선 개들이 머리를 내밀고 짖는다. 누구냐고 묻는듯하다. 
  ‘족돌바위가 어디래요?’ 묻자 ‘여긴데요’ 한다.
-마을 말고 ‘족돌바위’가 정말 있어요? 
-있지요. 저 빈집 뒤로 돌아가면 있지요.
  정말 ‘족돌바위’는 산기슭 아래 있었다. 족두리처럼 생긴 바위지만 그리 크지 않다.
  ‘족두리’는 우리나라의 전통 의상중 하나다. 전통혼례를 올릴 때 족두리 쓰고 연지곤지를 찍는다.  족두리는 부녀자가 예복에 갖추어 쓰던 관(冠)으로 족두(?兜) 또는 족관(?冠)이라고도 한다. 겉을 검은 비단으로 싼 여섯 모가 난 모자로 위가 넓고 아래로 내려갈수록 좁다. 검은 비단으로 겉을 싸고 안은 딱딱한 종이와 솜을 넣어 단단하게 했으며 꼭대기에 칠보 장식을 해서 아름답게 꾸민다.
  족두리의 기원은 〈오주연문장전산고〉고려사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 원나라에서 왕비에게 고고리(姑姑里)라는 것을 보냈다고 하는데 그것은 곧 관(冠)의 이름으로서 세상에 전해진 것이다. 지금의 족두리라는 것이 고고리와 그 음이 비슷해 혹시 고고리가 와전되어 족두리가 된 것은 아닐까-라고 했고, 〈고사통 古事通〉에는 ‘지금도 여자의 예장에 쓰는 족두리는 몽골의 사부녀(士夫女)가 외출할 때 쓰는 모자’라고 하여 족두리가 몽골풍임을 말해준다.
  〈임하필기 林下筆記〉에서는 족두리는 광해군 때부터 겉은 검정 비단, 안은 자주 비단으로 싸고 속을 비게 하여 머리 위에 썼으며 나라의 풍속으로 변했다고 하여 민간화 되었음을  기록하고 있고, 영조·정조 때 가체금지령이 내린 이후 성행했으며 근대 이후로는 혼례용 수식으로 쓰이고 있다.
  족두리에는 장식이 없는 민족두리, 호화로운 장식의 꾸밈족두리, 상례에만 쓰였던 흰족두리 등이 있다.
  족두리를 생각하며 바위를 보니 꼭 닮았다. 다만 빈집 뒤에 가려져있어 일부러 찾아가야 한다.
  빈집은 서울사람에게 팔렸고 주인은 가끔씩 온다면서 그때마다 온갖 잡동사니 (항아리)등을 끌어들인다고 한다.
  ‘방량골’과 경계를 이룬 능선 아래로 작은 골짜기가 나있다. 
  ‘족돌바위’ 아래 골짜기는 ‘파밭골’이고 그 아래 ‘벼락바위’가 있다. ‘삼현 무네미’와 경계를 이루는 골짜기는‘ 까치골’이고, 거기서 조금 올라오면 ‘구매바우’가 있는데 바위틈에서 약수가 나온다고 한다. 
  ‘족돌바위’에서 ‘골말’로 들어섰다 . 비석이 서있는 동산을 골짜기가 둘러싸고 ‘수너미재’쪽으로 ‘샘골’이 있다. 다시 ‘골말’로 오르다보면 ‘공주터’로 이어지는 농로가 나있고 골안으로 ‘안터’, ‘가골’ 그리고 ‘막골’이다. 막골 위로 고속도로가 지난다.
  ‘막골’에서 나와 다리를 건너 큰길로 나왔다. 월운학교 뒤뜰에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너른 버덩이 후동 내치기에서 끝난다. ‘노루터’ 뜰이다. ‘공주터 수작골’에서 빠진 노루가 나왔다는 전설이 있지만 그 지형을 살펴보면 노루궁뎅이처럼 생겼다.
  노루는 하늘의 비밀을 알고 있는 동물이라 하여 영험한 동물로 여겼다. 그 이야기의 대부분이 은혜를 갚는 이야기다. 노루와 고라니는 비슷하지만 고라니는 뿔이 없고 견치가 나오며 노루는 수컷만 뿔이 있다.
  특히 노루의 사향은 수컷이 발정기 때만 발달하는데, 사향을 분비하여 이성(異性)을 유인하는 구실을 한다. 그 때문인지 예부터 노리개로써 향낭을 달았던듯하다. 
  그러나 나는 이곳 ‘노루터’에서 메뚜기를 잡으며 어린 시절의 가을을 보냈던 기억이 있다. 
 글·사진 허 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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