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宮)·상(商)·각(角)·치(徵)·우(羽)’ 
  ‘오음산’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듣는다. 산이 간직한 소리일까? 봉우리마다 가지고 있는 저 소리를 들으며 ‘오음산’에 오른다. 
  오음육률(五音六律)이다.
  초겨울의 산행은 이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몸을 맡긴다. 산은 늘 거기에 있고 나는 산 속으로 들어간다. 마음을 열고 듣는 소리의 깊이가 오음육률 아니겠는가? 
산 아래에서 불어오는 바람소리와 산 아래로 흘러가는 물소리를 듣는다. 마른 잎을 흔들며 불어오는 바람소리는 맑고 투명하다. 
  살얼음이 깔린 계곡물 소리는 귀를 씻어낸다. 그리고마른 가랑잎이  받아들이는 초겨울의 빗소리와 순간 몸을 바꾸어 내리는 눈은 자연의 품으로 귀의하는 발소리처럼 들리고, 운율로써 전하는 산새소리와 땅이 울리는 소리는 생의 날개를 달아주는 소리로 들린다.
  ‘오음산’은 홍천군 동면 월운리 절골, 공주터와 홍천읍 삼마치리 원터, 싸리재골 그리고 횡성 공근면 상창봉리 늘어실 사기전골을 품은 큰 산이다.
  횡성 쪽에서 정상을 보면 펑퍼짐한 아낙의 가슴을 닮았고, 동면 월운리에서 보면 하늘선이 분명한 사내대장부의 기개를 보여준다. 따라서 월운리 절골이나 공주터에서 오르는 길은 바위등성이를 넘고 넘어야하는 험난한 길이어서  횡성 공근면 창봉리 늘어실에서 산행들머리를 잡는 등산객들도 더러 있다.  
  그러나 오음산은 예나 지금이나 ‘큰삼마치고개’에서 들머리를 잡는다. 홍천에서 5번 국도를 따라 횡성으로 가다보면 삼마치터널 어귀에서 오른쪽으로 오르는 5번국도 삼마치 옛길이 나온다.
  조그만 조립식 건물이 보이고 오른쪽으로 북부영림소 ‘삼마치자연생태숲체험장’이 개설되어 있다. 
  오음산행 들머리는 삼마치 임도가 된다.
  예전에는 이곳에 휴게소가 있었다. 오음산 정상까지 이어지는 산행 이정표를 따라 한 땀 쏟아내면서 오르다보면 정상이다. 물론 정상을 앞두고 헬기장에서 한숨 돌리며 사방으로 이어지는 능선의 물결이 볼만하다. 
  오음산행의 묘미는 헬기장부터 정상까지 오르는 길이다. 정상은 쉬 내주지 않는다는 것을  오음산은 분명 말하려는 듯하다.
  여기서부터 로프를 타고 바위를 올라야 한다. 경사가 급하다. 그러나  일단 올라서면 볼거리가 많다.
  암산(巖山)이 빛어낸 오묘한 형상의 바위와 아름다운 상처를 드러내놓고 서있는 갈참나무 그리고 고사목. 소나무 고사목이 서있는 전방바위에서 내려다보이는 저 곳이 내가 여태껏  살아왔던 삶의 공간이라는 것인데  믿기지 않는다.
  인간 세계에서 한번쯤 잠시 벗어나 자연으로 돌아가는 시간이다. 눈을 감으면  오음의 소리가 느껴진다. 그러나 가장 큰 소리는 내 몸 안에서 울리는 소리다. 너무 빨리 온 것이다. 그리하여 뒤를 돌아보라는 것이다. 그게 정상을 눈앞에 두고 산이 인간에게 베푸는 묵언이다. 그 자리에 ‘거북바위’가 있다. 거북이는 움직이는 형상이다. 그도 힘들다는 듯 길게 목을 빼고 숨을 내뿜는 듯하다.
  천천히 가보라.  정상이다.
정상에서 바라보는 백두대간의 골격이 눈에 잡힌다. 멀리 설악산 대청봉에서 이어져 내려오는 푸른 산줄기의 물결 소리다. 
  오음산에 구전되어 내려오는 전설에 따르면 ‘옛날 사람들은 홍천과 횡성의 경계를 이루는 이 산에서 다섯 명의 장수가 태어나리라는 풍수설을 믿었다.
  장수가 태어나면 그 마을이 편안할 수 없다는 말을 믿어온 이 마을 사람들은 장수가 나타나리라는 이 산 골짜기 바위굴에다 구리를 녹여 퍼붓고 창을 꽂았다. 그랬더니 과연 장수의 혈맥이 끊겼던지 검붉은 피가 용솟음치며 다섯 개의 괴상한 울음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그 뒤 삼일이 지난 날 저녁. 주인을 잃은 세 필의 백마(白馬)가 나와 힘없이 이 고개를 넘어 어디론가 사라졌다 한다. 그 후 다섯 가지의 괴상한 울음소리가 났다하여 오음산이라 하고, 세 마리 말이 넘어갔다하여 삼마치란 이름이 이 고개에 붙여졌다’고 한다.
  장수가 다섯이 나왔으면 말이 다섯이 나와야지 왜 셋일까?
  마을 사람 중에는 삼마치란 전설에 대하여 다른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삼마치고개는 홍천과 원주를 잇는 큰 고개였지. 걸어서 가면 종일 걸어도 못 갔다구. 말을 타고 가도 세 번을 갈아타고 가야 할 만큼 높기도 하고 험하기도 하여 삼마치고개라 부른다.’
  ‘오음산’은  930m 로 그리 높은 산은 아니지만 정상까지 다녀온 등산객들은 산행의 묘미가 오래 남는 깊은 산이라고 한다.
  횡성쪽 남향의 완만한 능선과 월운쪽 북향의 능선은 다른 산의 모습의 얼굴을 하고 있다.
특히 북향의 월운쪽은  첫눈이 내리면 이듬해 봄이 되어야 녹을 만큼 햇살도 비껴가는 산이다. 하여  늘 그늘이 깊고 서늘한 바람이 불어 내려온다.
  그래서 늘 안개가 서리고 구름이 인다. 그런 산도 달밤에는 구름 속에 가려진 그 환한 얼굴(산)을 보여준다 하여 산 아래 마을을 ‘월운(月雲)’이라 한다.
  ‘월운’은 오음산 아래부터 ‘개암둔지’, ‘과녁터’, ‘양지말’, ‘석봉안’, ‘공주터’, ‘버덩말’, ‘담을네미’, ‘노루터’를 합쳐 부르는 마을이다.
  ‘개암둔지’는 오음산 아래 잇닿은 둔지버덩이다. 그 중심에는 ‘절골’이 있다. 홍천읍지에 ‘오음산에 <오음산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로 인하여 붙여진 듯 한 ‘향골’, ‘저락골(절앞골)’과 계곡이 휘돌아 감은 둔덕에 ‘절터’라는 지명이 남아있다.
  ‘절골’의 뱀막은 ‘배너미재’로 이어지는데 이상하게도 동면에서만 잘록한 능선자락이 잘 보인다. ‘배너미재’는 아주 먼 옛날 온 세상이 물바다를 이루었을 때 배가 넘어 다녔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때 오롯이 남은 오음산 오른쪽 상봉은 매처럼 생겼다하여 ‘매봉’이라 부르고, 왼쪽봉우리(군인 통신시설로 등산 불가)는 해방 후부터 밤마다 등대처럼 불을 밝힌다 하여  ‘잣동고리’다.
  절골 안막에는 ‘아갈바위’가 있고 ‘절골버덩’은 인삼밭이다. ‘절골’로 오음산행 들머리를 잡은 사람들은 아름드리 소나무 숲을 지나게 된다.
  ‘삼마치고개’는 둘이다. ‘월운’에서 ‘웃어둔이’로 넘는 고개는 ‘작은삼마치고개(小三馬峙)’고, ‘삼마치 원터’에서 ‘창봉’으로 넘는 고개는 ‘큰삼마치고개’다.
  ‘작은삼마치’ 고갯마루에는 1974년에 개통했다는 표지석이 서있고, 시멘트로 조성한 탱크조형물이 서있는 것으로 보아 군사 훈련장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고개는 약 삼백여년 전에는 길이 없고 고개만 있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해 어느 양반집 자손 셋이 고개를 넘어 과거를 보러가게 되었는데 길이 없어 힘을 합쳐 길을 내며 과거를 보러가기로 하고 길을 닦기 시작했다. 길을 내는데 너무 많은 세월이 흘러 과거도 못보고 길만 닦다가 늙었다고 한다. 
  또한 이 고개는 인근 마을의 나물꾼들에게 잘 알려진 고개다. 사오월이 되도록 눈이 허옇게 덮인 오음산만 바라보다가는 봄이 다가도록 나물 구경 못한다며 이 고개를 넘어 ‘어둔이’로 나물을 하러간다. 고개만 넘으면 ‘어둔이’는 봄이 한창이어서 두릅이며 참나물 취 곤드래 으아리 등 온갖 나물을 뜯어 자루에 담아 이고지고 넘어오곤 했다.
  어머니가 고개 넘어 ‘어둔이’로 나물 뜯으러 간 날이면 학교 끝나고 형들과 경운기를 몰고 고갯마루에서 기다리곤 했다. 나물자루를 이고 올라오는 엄마를 부르며 기다리다가 메아리처럼 들리는 ‘여기다’ 소리가 나면 달려내려가 나물짐을 받아 메고 올라왔던 일이 아직도 생생하다.
  경운기 뒤에 타고 오면서 어머니는 이런저런 애기를 많이 들려주셨다. 그러다가 생각난 듯  보따리에서 손가락 만한 찔렁(찔레순)을 꺼내주시곤 했다.
그런 기억을 더듬으며 ‘비둑치버덩’을 들어서서 ‘놀난재이’로 접어들어 ‘큰과’, ‘작은과’를 지나 ‘작은삼마치’ 고갯마루에서 서있다가 돌아섰다.
  해마다 ‘큰삼마치고개’에는 봄에는 나물투어, 가을에는 버섯투어 관광버스가 하루에만도 많을 때는 대여섯 대 씩 들어오기도 한다.
  ‘월운리’와 ‘싸리재’를 중심으로 임도와 함께 어우러진 자연 자원을 활용하면 새로운 테마여행지가 되겠다 싶다. 
  능선을 굽어보면 ‘소삼마치고개’보다 더 잘룩한 산마루가 있는데 ‘오음산’과 ‘지르매봉’(만대산에서 오음산으로 이어지는 봉우리- ‘호덕봉’과 ‘지르매봉’이 있다) 사이의 ‘뱀골고개’다. 바로 ‘중앙고속도로 삼마치터널’이 지나고 있다.
  ‘뱀골고개’로 이어지는 ‘비둑치’는 ‘절골’과 더불어 음지식물의 낙원이다. 계곡을 따라 겨울트래킹을 하다보면 고드름이 한발씩 자란 한겨울에도 바위와 고사목을 덮고 있는 푸른 이끼 가 눈과 대조를 이루며 계곡 얼음장 밑을 흐르는 물소리는 끊임없이 산을 울린다.
  ‘비둑치’는 월운사람들에게는 낯선 곳이 아니다. 이승의 삶은 힘들었어도 저승에서 행복하길 빌며 회를 다졌는데 ‘비둑치 회골’에서 회를 캐다가 썼다.
비둑치 어귀에는 ‘월운저수지’가 있고 한때 비둑치 버덩에는 목장이 있었다. 목장주인은 말을 타고 다니면서 소를 돌봤는데 그 목장 집 손자가 말을 타고 학교에 오기도 했다.
  비둑치 버덩에서 개울을 따라 내려오다 보면 ‘가래터’가 나오는데 골짜기로 들어서면 ‘죽산에골’이 있고, 비둑치 버덩에서 개울을 건너면 ‘개암둔지’이다.   
  ‘개암둔지(갬둔지)’는 말 그대로 개암나무가 무성하게 자란 둔덕이었는데 지금도 이곳에는 논은 별로 없고 전부 밭이다. ‘깨금’은 개암의 홍천사투리이며, 산백과(山白果), 처낭이라고도 하는데, 그 맛을 어찌 잊어 먹을 수가 있을까? 
  ‘개암(자작나무과)’은 전래동화 혹부리영감에도 나오는 열매로 9월에 갈색으로 익으며 도토리깍정이처럼 열매 아래쪽이 총포(總苞)에 감싸여 있다. 잘 익은 개암을 깨물면 정말 딱 소리가 난다.
  열매인 개암에는 지방과 단백질이 많이 들어 있으며 날 것으로 먹으면 밤 맛이 난다.
  개암의 즙에 쌀을 갈아 넣어서 죽으로 먹기도 하는데 이 죽을 개암죽 또는 진자죽이라고 한다. 한방에서는 가을에 열매를 따서 햇볕에 말린 것을 진자(榛子)라고 하며 이는 기력을 돕거나 위장을 튼튼하게 하는 데 쓰인다.
  개암나무는 얼굴이 너무나 아름다웠던 공주가 자신의 얼굴이 흉하게 된 다음 탄식을 하다가 죽은 공주의 무덤에서 난 나무가 바로 공주의 화신이라 하고, 흉하게 된 얼굴을 감추기 위해 두 장의 굳은 껍질 속에 자기 얼굴을 감추고 있는 것이 바로 개암나무의 열매라는 전설이 있다. ‘개암둔지’와 ‘절골’을 합쳐 ‘진평’이라 한다.
   버스종점에서 진평으로 건너는 다리가 놓여있고 멋들어진 소나무가 푸른 몸을 지지대에 기대어 힘겹게 서있다.
  이곳이 ‘관역터’다. ‘관역터’는 관역에서 나온 지명이다. ‘관역(灌域’)은 관개(灌漑)가 가능한 지역으로 수로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된다. 월운리 버스종점의 멋들어진 소나무가 아래로는 응고가 있었고 그 물줄기가 ‘관역터’를 지났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마을사람들은 관역터는 옛날 활과 창으로 사냥하던 시절 이곳에 과녁을 세우고 활을  쏘던 곳이라 과녁터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관역터’에서 고개를 넘으면 ‘후동리 동막골 큰논골’이고, ‘양지말’과 경계를 이루는 작은 바위산은‘ 퉁퉁바우’다. 
  ‘개암둔지’와 능선을 맞대고 있는 골짜기는 ‘공주터 수작골 ’이고, ‘오음산 매봉’의 능선이 마을까지 내려와 ‘돌봉’을 이루는데 그 마을이 ‘석봉안(石峯)’이다. 석봉을 마을에서는 ‘노적봉’이라고도 부르며, ‘석봉안’에서 ‘가는골’로 들어서서 능선을 넘으면 ‘수작골’이다. 좁은 산길을 걷는 동안 소나무향이 몸에 배어들어 좋다. 석봉안에서 다리를 건너 ‘양지말’로 들어섰다. ‘양지말’은 마을의 중심이다.
  정자가 있고 마을 공동 창고와 마을회관 경로당이 있다. 오래된 정미소에서 한 떼의 참새가 날아간다.
  정미소 아래에 교회가 있고 그 사이 공터가 ‘월운초등학교’가 처음 세워졌던 곳이다.
  정자 앞에는 88올림픽석이 서 있다. 월운청년회에서 1989년 3월1일에 세웠다. 1974년 사단법인 월운리학구단위노인회가 창설되었다는 내용과 한시(漢詩) 두수와 고적전설시를 함께 새겨놓았다.
  한시의 제목은 寺谷淸風(사곡청풍)과 사곡천렵시조이고  고적전설시(古蹟傳說詩) 내용은 다음과 같다.

소삼마치 고적비 관역터 활양유
사골절 월운공주대 석봉안 노적봉
사곡천 산신당 황구분터 흔들바위
오음산 배너미 괴목년 좌배여년

위 시에서 소삼마치와 관역터, 사골절, 월운공주대, 석봉안, 노적봉 ,사곡천, 산신당, 황구분터, 흔들바위, 오음산, 배너미는 알겠는데 고적비와 활양유  괴목년 좌배여년은 알 수 없다.
  또한 사곡청풍의 <山間流水白玉淸 (산간유수백옥청)>이란 구절과 사곡천렵시조의 <玉流飛瀑石頭環(옥류비폭석두환)>구절에서 사곡천(寺谷川)에는 폭포와 백옥같이 맑은 물이 흐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곡천과 사골절은 같은 지명으로 지금의 절골을 가리킨다.  이곳에 절이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그 절이 오음사일 가능성이 크다. 마을에서는 그곳으로 천렵을 가기도 하였겠고 푸른 물줄기가 날아 내리는 비경에 흠뻑 취하기도 하였음은 분명하다.
  ‘양지말’에서 길을 따라 학교 쪽으로 내려오다가 오른편 양지바른 산기슭에 정문이 서 있다. 올라가보니 ‘남궁부자효자정문’이다. 
  자신의 새끼손가락을 단지하여 피를 모친의 입속에 흘려 넣어드리고 약으로 자신의 허벅지의 살을 베어드시게 하는 등 살신성인의 효행을 베푼 남궁종의 이야기는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런데 왜 정문에  두 분의 부자(夫子)를 모셨을까?
  이 정문은 남궁종(南宮種)과 남궁준(南宮俊)부자의 효행을 기리기 위하여 1900년에 건립되었다. 효자 남궁종은 어머니가 병환으로 눕게 되자 자신의 새끼손가락을 잘라 피를 드린 후 회복케 했으며 매일아침 문안을 드린 후 일을 시작하였다.
  부친의 효행을 보고 자란 아들 준의 효행도 탁월하여 칭찬이 자자하였다.
  아버지가 병환으로 자리에 눕게 되자 백방으로 수소문하여 좋다는 약은 다 구해다 구환을 하면서 10여년을 하늘에 기도를 드렸지만 효험이 없어 낙담하고 있던 중, 신선 만난 꿈을 꾸고 산삼을 세 뿌리를 캐어 정성으로 달여드렸더니 하루아침에 건강을 되찾아 70세를 향수하였다고 한다.
  지병에 효자 없다고 하지만 하늘을 감동시킨 아들의 효행이 마을에서 마을로 번져나갔고 그 효행을 기리기 위하여 광무 28년(1891년)에 효자로 하명 받고 남궁종 남궁준  두 부자의 효자정문을 세워주게 되었다.
  1978년에 보수를 하였다지만 탐사 팀이 찾아갔을 때는 울타리가 무너지는 등 허술해 보였다.    
  옛날부터 효는 모든 선의 근본이고, 불효는 모든 악의 근본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자기 부모를 잘 섬기는 사람은 자기 고장을 사랑할 수 있고, 더 나아가 자기  나라에 충성을 다할 수 있다고 하였다.
  여기서 ‘월운고개(후동고개)’를 넘으면 어머니가 계시는 시골집이 빤히 보인다.
  초등학교 때 넘어 다녔고 또 오랫동안  버스 타러 넘어 다녔던 고개를 넘어 집에 가야겠다.
  자주 찾아뵙겠다고 가까이에 모신 아버지 산소에도 올라가 그동안 살아온 서럽고 서글픈 이야기도 풀어놓고 어머니와 저녁을 먹고 이야기도 나누고 가야겠다.
 글·사진 허 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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