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타사 주차장 주변은 상가를 이루고 있다.
  민박이며 음식점 등 여느 유원지와 크게 다르지 않지만 특색 있는 음식을 꼽으라면 콩 음식과 민물 매운탕을 꼽을 수 있다. 
  잘 알려진 콩 음식은 순두부, 초두부, 모두부 등 두부와 두부를 들기름에 지진 두부구이 새우젓으로 간을 한 두부찌개, 콩자반, 콩물국수, 청국장, 비지장, 갈아서 마시는 두유, 콩떡, 콩고물, 콩죽, 콩탕 정도고 볶은콩이나 콩엿강정, 콩나물, 된장 청국장 등 등 가짓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지만 이런 겨울초입에는 ‘콩탕’을 먹고 싶다.
  콩 음식이 쉽게 변질되는 성질이 있지만 주말의 특별식으로 내놓는다면 수타사를 찾는 관광객들의 발길을 잡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것도 강원도 토종 식으로 말이다.
  시골의 어머니가 해주셨던 ‘콩탕’은 소박하면서도 담백한 맛이었다. 돼지등뼈와 우거지 그리고 콩이 전부였으며 간은 양념간장으로 하고 반찬으로는 김칫독에서 금방 꺼낸 시원한 총각김치였는데 두 그릇은 기본이었다.
  그 맛을 기억하듯 수타사를 갈 때면 꼭 기억나는 고개가 있다. ‘절안(寺內)’으로 들어서는 ‘노루목고개’다. 아무도 이 길로 다니는 사람이 없지만 그 길을 걸어 넘는다.
  나는 초등학교 때 이 고개를 걸어 넘어 소풍을 왔고 다시 이 고개를 넘어 집으로 갔다. 주차장에서 개울을 건너 ‘샘골’로 오르다가 강을 따라 내려가면 고개 밑이다.
  예전에 샘골에는 시원한 ‘샘통’이 있었다. 골은 그리 깊지 않은데 마르지 않았다. 최근에는 샘골 안에 한옥을 짓고 누군가 살고 있다.
  절안 고개 밑집 옆에는 돌배나무인가 야광(애강)나무가 있었던 것 같다. 고개를 오르다 개울 건너편을 보면 민박과 음식점을 하는 집들이 산밑으로 다문다문 들어서있는데 이곳이 ‘절안’이다. 절안은 ‘웃물봉’을 중심으로 아늑하게 에두른 능선밑이 되는데 그 사이로 신봉으로 넘던 고개가 남아있다. 일명 ‘신봉고개’다. 이 고개는 신봉 ‘궁터’로 이어지던 길이었으나 지금은 ‘절안’을 찾은 사람들의 산책길로 이용되고 있다. ‘절안’은 일찍 저녁에 든다. 이곳에 살던 사람들은 주로 사찰지의 땅을 붙이며 살았는데 최근에는 수타사를 찾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민박이나 음식점을 한다. 수타사를 찾은 사람들은 네 가지의 즐거움을 얻는다고 한다. 물과 숲과 절과 산이다.  맑고 시원한 물과 물소리 다양한 토종물고기와 다슬기, 공작산 생태숲과 푸른 나무그늘 아래 피어나는 야생화,  천년의 향기를 느끼는 수타사, 그리고 약수봉과 공작산 산행이다.
  하루를 쉬더라도 몸과 마음이 편해야 한다. 그것은 땅의 정기와 하늘의 기운을 받아들일 수 있는 고향 같은 곳이면 더 좋다.
  산에 다녀오고 나면 몸이 가볍고 마음이 맑아지는 것은  천지의 기운이 몸속에 깃들기 때문인 듯하다.
  ‘노루목고개’를 넘으면 ‘순장뜰’이다. 고갯마루에 서서 바라보면 ‘덕고개(서낭고개)’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노루가 길게 목을 빼 물을 마시는 형국의 산세인데 그 고개는 노루의 목이 된다. 
  고개를 넘으면 외딴 농가가 나온다. 양지 바르고 땅은 부드럽다. 앞으로는 강이 휘돌아 흐르고 고풍스런 나무다리가 놓여있었는데 공사중이라 파헤쳐 임시로 널빤지 다리를 놓았다. 그 삶의 주인공은 늙도록 고집스럽게 농사를 짓고 있다.
  이 길이 원래 수타사길이다. 이 고개를 넘어 소풍을 다녀갔다. 목이 마르면 물도 얻어 마시며 넘던 길이다. 
‘순장뜰’ 앞으로 제방을 쌓으면서 산중턱을 깎아내고 지금의 길이 열렸다. 
  순장뜰이 옥답이 된 건 상전벽해라 할 수 있지만 그 옥답을 만든 데는 바닥에 깔린 모래알만큼의 땀이 필요했고 그 옥답에서 기른 무공해 자연농법 쌀을 직거래장터를 통하여 판로를 개척하고, 상호교류를 통하여 신뢰를 다졌다. 1995년부터 시작된 메뚜기 쌀은 호응을 얻어 지금은 농협을 통하여 소비자의 식탁에 오른다.
  옥토의 물꼬는 개울 어귀 ‘순장보’에서 부터 시작된다. 논으로 이어지는 도랑에선 족대를 대고 토종 미꾸라지를 잡기도 한다.
  순장뜰에서 아치형 다리를 건너면 ‘귀미뜰’이다. ‘윽새밭골(억새밭골)’ 어귀 아래 보를 막아 물을 끌어들여 농사를 짓는다.
  강을 따라 시원하게 뚫린 길 양편으로 벚나무를 심어 수타사를 찾는 사람들의 마음을 푸근히 맞이한다. 그 길목인 순장뜰 앞 개울가는 물놀이 하기에 안성맞춤이다. 모래바닥인데다가 그늘이 좋다.
  ‘순장뜰’  뒷산으로 이어지는 ‘매방울골’과 ‘드렁골’을 지나면 ‘절안’이다. ‘드렁골’에는 호랑이굴이 있었고  골은 깊어 ‘속초 속새울’로 이어지고, 골 안막까지 나물이며 나무를 하러 다녔다고 한다.
  이렇게 구전으로 내려오는 이야기를 담은 작은 안내판을 곳곳에 세워놓는다면 마을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볼거리 추억거리뿐만 아니라 마을을 알리는 좋은 이미지를 심어줄 것이다. ‘귀미뜰’ 뒷산으로 이어지는 골짜기는 ‘복상나무골’과 ‘윽새밭골’인데 윽새밭골 어귀에는 미루나무가 서있고 골 안으로 들어가면 ‘닥밭골’과 ‘마당터골’이 능선으로 이어진다. 그 능선은 ‘약수봉’으로 이어지는 등산로이기도 하다. 
  ‘덕치(德峙)’는 ‘수타사’를 중심으로 ‘둔지’ (절안, 순장뜰, 귀미말, 노루목 고개), ‘큰말’, ‘새터말’, ‘소구니’, ‘여우고개’를 아우르는 마을이다. 마을을 이루는 작은 부락마다 집들이 오롯하다.
  ‘순장뜰’과 ‘덕고개’, 새터말’의 길이 모이는 ‘큰말’은 ‘응봉’을 배산으로 하고 있으며, ‘큰무레이’와 ‘작은무레이’를 따라 이어지던 지맥이 ‘단봉’을 이룬다. 그 자리에 ‘홍천용씨(洪川龍氏)’의 제각 ‘화산재(花山齋)’가 있다. 화산재에는 홍천용씨 시조 위패를 모신 사당과 유허비가 세워져 있다. 매년 음력 3월3일에 제를 올린다. 홍천 용씨(洪川龍氏)의 시조(始祖)는 ‘용득의(龍得義)’다. 
  용득의(龍得義)는 원래 유학자였다. 경학(經學)에 박통했고 문장은 맑고 우아해 당대의 유종(儒宗)으로 존경받았다. 
  용득의는 희종때 시어사를 거쳐 고종 28년(1241) 문하시중에 올랐다.
  평소 불심이 깊었고 몽골의 침입을 불심으로 막아보려는 의미로 고려 고종 23년(1236)부터 16년동안 6778권에 총 경판(經板)수 8만1258판에 달하는 방대한 팔만대장경을 각판하는 불사(佛事)를 총지휘했다.
  주전론을 주장했던 최씨 정권은 고종 45년(1258) 몰락하고 왕정복귀로 태자가 몽골에 입조하고 개경 환도 등 고려가 몽골의 지배를 받자 항몽론자인 용득의는 벼슬에서 물러났다.
  만년에 용득의는 홍천으로 내려와 ‘북방면 금학산’ 기슭에 ‘용수사(龍遂寺)’를 세웠고 인근에 불도들의 수련도량인 ‘학서루(鶴棲樓)’도 창건하는 등 불교와 경서(經書)등을 가르치다 원종14년(1273) 전후로 세상을 떠난 것으로 보인다.
  ‘용수사’로 추정되는 사지(寺址)는 금학산기슭의 ‘절골’이다. 한국지명총람에는 용수사와 학서루를 고려 희종 때 시어사(侍御使) 용득의가 세웠다고 서술되어 있고 세보(世譜.1799)의 현판기(懸板記)에는 용씨가 세웠다는 기록이 있어 홍천의 세거씨족인 용씨와의 관계가 명확하게 나타났다.
  용수사의 규모는 여지도서(與地圖書 1757~1765)에 22칸으로 기록한 것을 확인했고, 조선후기인 18세기에 만들어진 ‘홍천현읍지’에 용수사가 거론되고 이후 홍천군읍지(1899)에 금폐(今廢)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화산재’ 문이 굳게 닫혀있어 들어가지는 못하고 밖에서 맴돌다 ‘덕고개’로 향했다.
  ‘덕치(德峙)’는 덕고개에서 유래된 마을로 ‘응치(應峙)’로 불리기도 했다. 덕고개는 덕치 큰말과 속초를 잇는 고개다. 덕치쪽에서 덕고개를 넘다보면 왼편쪽으로 난 골짜기가 있다. 이 골짜기에는 김 정승이 살았다고 하여 ‘김정승골’로 불리다가 지금은 성도 떼고 ‘짐승골’이라 부른다. 이 골짜기는 속초초등학교 뒤 ‘원개울골’로 이어진다. 예전에는 넘어다녔다고 하지만 지금은 덕고개 길이 잘 나있어 다니지 않는다. 
  ‘덕고개’를 넘으면 ‘속초’다. 속초에서는 ‘서낭고개’라고 하는데 지금도 고갯마루에는 서낭당이 있다. 예전에는 서낭당 고개길은 ‘쌍묘길’을 따라 돌아가는 길이었고 고갯마루에는 짐승들이 많이 나타나 덫을 많이 놓기도 했다.
  ‘큰말’은 덕치의 중심이다. 마을회관과 경로당이 자리한다. 마을 뒷산인 ‘응봉’은 매를 놓아 사냥하던 곳이다. 
  큰말에서 화산재를 둘러보며 개울을 건너면 ‘새터말’이다. ‘새터말’은 ‘비선뜰’과 ‘양지말’을 포함한다.
  ‘양지말’은 화산재 개울 건너편이 된다. 둥그러니 개울이 감싸 흐르는 양지말에는 여름철 물놀이터인 ‘무당바위’가 있다. 골프연습장 아래이다. 소를 이루고 있어 물이 깊고 물고기가 풍부하다. 또한 새터 다리를 건너지 말고 제방길을 따라 내려가면 ‘자고새’ 농장이 있다. 농장 앞에서 ‘비선뜰’로 건너는 돌다리가 놓여있다.‘자고새’는 꿩과의 새로 메추라기와 비슷하며 날개는 누런빛을 띤 녹색이고 등, 배, 꽁무니는 누런 갈색이다. 목에서 눈에 걸쳐 까만 고리가 둘려 있으며, 부리와 다리는 붉다. 건조하고 메마른 바위로 된 경사지, 개방된 산림 지대, 경작지 등에 서식한다. 30∼40마리가 무리를 이루어 함께 지낸다. 매우 민첩하고 감각도 예민하며 경계심이 강한 새로 돌이나 풀 사이에 몸을 숨긴다.
  수컷은 투쟁심이 강하여 자기 영토를 쉴 새 없이 돌아다니며 감시하고 침입자가 있으면 즉시 달려가 쫓아버린다. 날개를 시끄럽게 퍼덕이면서 낮게 난다.
  ‘자고새’는 성경에도 등장하는데 ‘예레미야 17:11에 불의로 재산을 모은 사람은 자기가 낳지 않은 알을 품는 자고새와 같아서 인생의 한창때에 그 재산을 잃을 것이며, 말년에는 어리석은 사람의 신세가 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그런 때문인지 성경에서 자고새는 망령되고 거짓된 혀로 재물을 얻은 자, 정당치 못하게 취득한 부, 불의로 치부, 타인의 재산을 도적질, 경영 성적에 대한 유혹, 회계 부정, 회사 모양을 그럴듯하게 만들어 도덕 불감증과 빗나간 탐욕, 종업원들과 주주의 이익을 외면한 채 게걸스럽게, 교활한 사기, 욕심을 부리고 집착, 내용보다는 겉으로만 그럴싸하게, 시늉만 충실한 척, 빈 가슴등의 의미로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자고새를 직접 보니 세상 물정 모르는 순박한 시골처녀 같았다. 그래서인지  뻐꾸기의 알을 부화하는 새, 남의 알을 훔쳐다가 그것을 자기 알처럼 품어서 부화시키는 새로 많이 알려져 있다. 
  다시 개울을 건너면 ‘비선뜰’이다. ‘무당바위소’ 위로 골프연습장이 자리하고 있고 산 아래 집들이 모여 있다.   
  홍천에서 제일 처음 생긴 이 골프연습장에는 홍천역 기차식당이 있다. 기차라는 이미지가 소풍과 여행이라는 느낌이 강하다. 그런 까닭에 ‘심심풀이 땅콩이나 삶은 계란, 음료수 있어요’라는 목소리를 기대하고 기차를 탔지만 레스토랑이었다.
  박세리 키드의 골퍼들도 홍천에서 배출되었는데 홍천농업고등학교 출신의 ‘이보미’선수다. 인제 북면 한계리에서 유년시절을 보내며 원통초와 원통중을 거쳐 홍천농고를 졸업한 이보미는 태극마크를 달고 한일여자프로골프대항전에 출전하여 좋은 성적을 거두었고, 한국여자프로 골프(KLPGA)투어 넵스 마스터피스2009에서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그 뒤를 이어 최선주 골퍼가 KLPGA(한국여자골프협회) 정회원이 되어 활동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홍천농업고등학교 골프 팀도 좋은 성적을 내고 있다.
  ‘비선뜰’이 감싸 안은 산자락에 자리한 골프연습장은 프로골퍼의 레슨을 받으며 골프의 묘미를 즐기는 매니아들로 활기 가득하다.
  ‘비선뜰’은 넓고 넓다. 경계를 지을 필요도 없다. 빙 돌아 영구미 농협아래, 덕고개(서낭고개) 아래까지 이어진다. 뜰이 감싸는 산을 ‘마산’ 혹은 ‘용마산’이라고 하는데 용마가 나왔다고 하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용마산’에는 ‘김해허씨(金海許氏) 숭모사(崇慕祠)’가 있다.
  ‘새터말’에서 ‘매봉재’를 넘어 학교 다니던 길이 있었고, 골안에 ‘소란’이란 작은 버덩이 펼쳐져 있다. 
‘비선뜰’은 원래는 ‘비석뜰’이었다고 한다. 경지정리되기 전에  길가에 비석이 서 있었다고 하는데 크기는 1.5m 정도였다고 한다. 
  그 비석 때문에 ‘비석뜰’이 되었는데 경지정리하면서 비석이 사라졌다고 한다. 비문의 내용을 기억하는 사람을 수소문 하여 만났는데 어떤 이는 ‘마을의 지명을 새긴 비석’이었다고 하고 어떤 이는 ‘원님이 지나갔던 길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비석’이라 하였다.
그 과정에서 중요한 사실을 찾았는데 경지정리 되기 전에는 ‘비선뜰’이 ‘거릿말’이었고 거릿말의 한 중간에 서낭당이 있었다고 한다. 
  서낭당의 흔적은 다 사라졌지만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위하여 지금도 길가에 서낭당을 모시고 제를 올린다.  
  그 후 ‘비선뜰’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비선뜰’은 ‘공작산’. ‘대학산’에서 흘러온 ‘덕치천’과 ‘먹방산’. ‘만대산’. ‘오음산’에서 흘러온 ‘성수천’이 만나는 버덩이다. 마을사람들은 ‘덕치천’을 ‘숫물’이라 하고, ‘성수천’을 ‘암물’이라 하여 비가 내릴 때 ‘성수천’이 ‘덕치천’보다 많이 나가면 큰 장마가 나간다고 하고, 덕치천물이 성수천물보다 많이 나가면 금세 그칠 비라고 예견하기도 했다. 
  두물이 만나는 ‘소구니’ 강변에는 다리가 둘이다.
  ‘소구니다리’를 건너면 ‘소구니골’로 내려가게 되고 ‘덕치다리’를 건너면 ‘여우고개’를 돌아 읍내로 가거나 성수, 속초로 이어지는 큰길이다.
  영귀미를 휘돌아 흐르는 개울은 ‘덕치천’과 ‘먹방천’, ‘후동천’, ‘월운천’, ‘개운천’, ‘삼현개울’이 ‘소구니’에서 합수를 이루어 ‘여우고개’를 돌아 흘러 ‘이괄바위’앞 ‘야루정’을 돌아 화양강으로 흘러든다. 
  탐사팀은 발길을 ‘성수천’ 쪽으로 돌려 ‘만대산’과 ‘오음산’줄기를 찾아 올라갔다. 물줄기는 ‘개운 노루터’에서 갈라져 한줄기는 ‘만대산’으로 다른 한줄기는 ‘오음산’에 닿았다.
  월운(月雲)이다. 초겨울 낮달이 노을구름 속을 빠져나오고 있었다.
글·사진 허 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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