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열시, 해피존 친구들과 약속한 공부방으로 갔다. 모자에 장갑을 끼고 중무장한 모습이 귀엽다.
‘1318 해피존 초록세상’은 홍천군새마을지회에서 운영하는 청소년 지역아동센터로 13-18세의 청소년들이 적극적이고 자발적인 자신의 공간을 찾아 자신만의 개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하여 작은 사회를 이루고 사랑을 주고받는 따듯한 곳이다.
해피존 초록세상에서는 사교육의 대안으로 교과교육 외에 다양한 프로그램을 실행함으로써 창의력과 인성교육 그리고 자신의 특기를 길러주고, 올바른 생활습관과 사회성을 함양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다.
‘홍천 1318 해피존 초록세상’은 2007년 1월에 문을 연 이래 매년 한명씩 도전 잉글리쉬 업 프로그램에 선발되어 해외 어학연수를 다녀오기도 했다.
초록세상 해피존 친구들이 함께 나선 수타사 탐방은 겨울산사의 고즈넉함과 우리고장의 문화에 대한 안목을 넓힐 수 있다는 점에서 뜻 깊은 여정이었다.
이번 답사의 목적과 둘러볼 것들에 대하여 간단하게 설명하고 차를 타고 ‘수타사’로 향했다.
‘여우고개’를 돌아가기 전 ‘야루정’ 앞에 차를 잠시 세우고 ‘이괄산성’에 대한 이야기들을 들려주자 ‘만약’이란 단서를 붙여 이괄이 구테타에 성공했다면 어찌되었을까 묻는다.
그건 나도 모른다. 역사는 만약이라는 가정 속에 존재하지 않는 그 자체가 실존이고 그 삶 이기 때문이다.
수타사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공작산생태숲교육관’으로 들어갔다. 무궁화 메카 도시답게 교육관 한 공간에 무궁화에 대한 자료들이 들어서 있고 산촌마을 삶의 도구들이 전시되어있다. 생태 숲에 대한 자료는 아직 미비하지만 직접 숲으로 들어가라는 뜻으로 알고 소나무 숲으로 들어섰다.
산문으로 들어서는 순간이지만 아이들이 숲으로 달린다.
밖이란 공간은 역시 자연의 공간이자 아이들의 공간이다. 숲 사이로 달리며 바람소리처럼 까르르 웃는다. 온산에 퍼진다. 낙엽이 진 늦가을의 풍경이지만 그 풍경 속으로 들어가는 아이들의 발걸음은 얼마나 가벼운가.
일단 아이들과 함께 부도들을 둘러보기로 했다. 철망이 쳐진 그 너머 10기의 부도와 3기의 비석이 나란히 서있다.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15호로 지정된 ‘수타사 홍우당 부도’는 조선시대 작품으로 추정되며, 방형 판석(板石)으로 지대석을 삼고 그 위에 하대와 중대를 한 돌로 만들었다. 6각을 기본형으로 상면에는 복련(伏蓮)을 조각했고 중석(中石)의 각 귀퉁이에는 마디가 있는 동자주(童童子注)를 조각하였으며 상대는 앙련을 조각하여 구형(球形)의 탑신을 받치고 있고, 위에는 6각의 옥개석이 있다. 하대보다 상대가 크고 상대보다 옥개가 더 커 보이며 높이는 2.15m이다. 부도 앞에 대사의 부도비가 있으나 마모가 심하여 판독이 어렵다.
‘청송당대사탑(菁松堂大師塔)’은 높이가 약 2m이다. 기단부의 하대는 복판(複辦)의 복련으로, 중대는 8각으로 8괘(掛)를, 상대는 복판 쌍엽의 앙련을 조각하였다. 신부(身部)는 둥근형으로 아무런 장식이 없고 위에는 6모의 옥개(屋蓋)를 덮었다.
‘기허당대연대사탑’은 높이 약 70㎝의 종형 부도로서 아무런 조각이나 장식이 없다.
내촌면 서곡리 출신의 ‘서곡대사 부도’는 높이 약 2.1m로 기단은 8각이며, 하대는 각면에 장방형 구내에 안상을 조각하고 상부를 복판쌍엽의 복련을 조각하여 구형의 신부(身部)를 받들고 그 위에 6모의 옥개(屋蓋)를 덮었다. 바로 옆에 사리탑비(舍利塔碑)가 있다.
‘유화당대사묘위지탑’은 높이 약 2m의 종형 부도로 길쭉한 모양을 하고 있다. 별다른 조각은 없고 ‘유화당대사묘위지탑’이라고 각자(刻字) 되어 있다.
‘중봉당탑(中峯堂搭)’은 높이 약 1.22m의 종형 부도로 각 면에 1개씩 8괘(掛)를 새긴 8각 대석(臺石) 위에 ‘중봉당탑(中峯堂搭)’이라고 새긴 신부(身部)가 놓였다.
‘홍파대사승왕탑(烘波大師勝王塔)’은 길쭉한 탄두형(彈頭形) 부도로, ‘홍파대사승왕탑(烘波大師勝王塔)’이라고 새겨져 있는 것 외에는 다른 장식이 없다. (국립문화재연구소)
홍우당은 광해군 때인 1611년에 나서 1689년에 열반하였으며, 속성(俗姓)은 남양 홍씨이고 법명은 선천(善天)이다. 그의 다비식때 네모난 사리와 둥근 은색 사리 두 알이 나와 이를 봉안한 것이 홍우당 부도다.
부도(浮屠)는 고승의 사리(舍利)나 유골을 안치하는 묘탑을 말한다. 부도, 부두, 불도라고도 하는데, 원래 불타(佛陀) 또는 솔도파(率堵婆. Stupa)라는 불상, 불교사원, 불탑을 의미하였지만, 뒤에는 고승들의 사리를 담는 석탑을 의미하게 되었다. 또한 사리탑의 사리(舍利)란 인도의 옛 말인 ‘사리라’에서 유래된 말로 유골을 의미하기도 한다. 수타사에 이름난 고승들의 부도탑이 세워져있다는 것은 수타사가 큰 가람이었음을 입증하는 증거이기도 하다.
부도탑은 소나무 숲 속에 자리한다. 대부분의 소나무 들은 일제강점기에 송진을 석유 대용으로 쓰기 위해 채취하던 흔적을 상처로 안고 살아오고 있다. 역사와 함께하는 이들 아름드리 소나무 중 제 몸속에 뽕나무를 키우는 소나무가 있다.
어느 날 새들이 오디를 물고 날아와 이 소나무가지에 앉아 먹다가 떨어뜨린 듯하다. 소나무에 깃든 불심이랄까?
부도탑 앞 수중보는 살짝 얼었다. 한때는 방생한 붉은귀거북이가 눈에 띄기도 했는데 지금은 푸른 물빛에 떠돌던 나뭇잎이 얼어 붙어있다. 생태숲 길은 보를 건너 오른쪽으로 이어진다.
계곡을 가로질러 놓인 공작교 건너기전 오른쪽 언덕에는 아주 오래된 ‘성황당’이 있었다. 성황당이 사찰 내에 있는 경우는 매우 특이한 경우인데 지금은 그 흔적만이 남아 있다.
수타사에는 아치형의 구름다리가 있었다. 최근에 놓은 수타교 이전에 있었던 다리다. 구름다리를 건너면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의 장승이 서 있었고(지금은 없다) 동갈나무가 서있고 동갈나무 앞쪽에는 하얀 모래밭의 강가였다. 개울 건너편에는 단풍나무가 듬성듬성 서있는 바위벼랑(단애)을 이루고 있다.
수타사로 들어서는 다리 앞에 작은 비가 세워져 있다. ‘하마비’다. 하마비는 조선 시대에, 누구든지 그 앞을 지날 때는 말에서 내리라는 뜻을 새기어 궁가, 종묘, 문묘 따위의 앞에 세웠던 비석이다.
1413년(태종 13년)에 종묘, 궐문(闕門)의 입구에 ‘대소 관리로서 이곳을 지나는 자는 모두 말에서 내리라’는 푯말을 세운 것이 처음 시작이라 한다. 말에서 내리는 것이 권위와 존경의 표시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수타사에 하마비가 있는 까닭은 수도하는 도량으로 경건한 분위기에 동참해달라는 의미로 풀이된다.
하마비에서 앞쪽은 ‘수타사삼층석탑’, ‘옥수암’으로 가는 길이고, 계곡을 따라 바라다 보이는 절벽 아래가 ‘용담’이고 다리를 건너면 ‘수타사 봉황문’이 나온다.
먼저 ‘일월사터’로 들어선다. ‘일월사’는 원효가 공작산아래 창건했던 절이다. ‘옥수암’으로 들어서다 오른쪽에 삼층석탑이 서있는 그 일원이다. 언제까지 ‘일월사’란 이름으로 이곳에 있었는지 알 수 없다. 그리고 아직까지 ‘일월사터’를 발굴 조사한 기록도 없다. 다만 석탑 어귀에 폐허가 된 암자가 잡초와 칡덩굴에 뒤덮여 있다. 지금은 ‘일월암’으로 불리고 있다. 몇 년 전 까지만 해도 이곳에서 공부를 하는 스님이 계셨다. 무상함을 느낀다.
그 옆에 강원도문화재자료 제11호로 지정된 ‘수타사삼층석탑’이 있다. 주위에 네모모양의 돌담을 쌓고 그 안에 안치한 석탑. 돌담을 처음부터 쌓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이런 형태의 석탑은 흔치 않다.
1.5m의 화강암(花崗岩) 삼층석탑으로 1층 기단 위로 3층의 탑신(塔身)이 올려져있다. 기단에는 아무런 장식을 하지 않았고, 2·3층 몸돌이 없어졌고 남아 있는 1층 몸돌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얕게 새겨 놓았다. 지붕돌은 네 귀퉁이가 뾰족하게 치켜 올려갔고, 밑면에 1 ·2층은 3단, 3층은 2단의 받침을 각각 두었다.
고려 후기에 세운 것으로 추측되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각 층의 지붕돌 너비가 거의 줄지 않고 있어 원래는 높고 날렵한 큰 규모의 탑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홍천군의 문화재 자료에 따르면 꼭대기의 머리장식으로는 동그란 돌 하나가 남아 있다고 설명하고 있으나 지금은 없다. 최근에 도난당한 듯하다.
그 뒤로 잡풀이 우거져있는 빈터가 ‘일월사’의 사지로 추정된다.
다시 오솔길로 나와 ‘옥수암’으로 오른다. 한 구비를 돌아 산 밑으로 들어설 즈음 길 아래 서있는 ‘연리목’을 본다. 밑둥이 붙은 가새뽕나무와 아까시나무다. 지금은 낙엽을 다 떨어뜨리고 찬바람을 맞고 있다.
‘연리지’는 후한서(後漢書) 채옹전(蔡邕傳)에 나오는 고사성어다. 후한 말의 문인인 채옹(蔡邕)은 효성이 지극하기로 소문이 나 있었다. 채옹은 어머니가 병으로 자리에 눕자 삼년 동안 옷을 벗지 못하고 간호해드렸다. 마지막에 병세가 악화되자 백일 동안이나 잠자리에 들지 않고 보살피다가 돌아가시자 무덤 곁에 초막을 짓고 시묘(侍妙)살이를 했다.
그 후 옹의 방 앞에 두 그루의 싹이 나더니 점점 자라서 가지가 서로 붙어 성장하더니 결이 이어지더니 마침내 한그루처럼 되었다. 사람들은 이를 두고 채옹의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와 자식이 한 몸이 된 것이라고 말한데서 유래되었고, 당나라의 시인 백거이(白居易)는 당현종과 양귀비의 뜨거운 사랑을 읊은 시 ‘장한가(長恨哥)’에서 칠월칠일장생전(七月七日長生殿 : 7월 7일 장생전에서), 야반무인화어시(夜半無人和語時 : 깊은 밤 사람들 모르게 한 약속), 재천원작비익조(在天願作比翼鳥 : 하늘에서는 비익조가 되기를 원하고), 재지원위연리지(在地願爲連理枝 : 땅에서는 연리지가 되기를 원하네) 비익조는 날개가 한 쪽 뿐이어서 암컷과 수컷의 날개가 결합되어야만 날 수 있다는 새로서 연리지와 같은 뜻으로 쓰였다. 말 그대로 서로 다른 나뭇가지가 맞닿아 하나의 나뭇가지처럼 사는 자연현상을 뜻하지만 오늘날에는 연인이나 부부의 애정이 지극히 깊음을 비유하기도 한다. 따라서 연리목을 보는 것만으로도 사랑과 소망이 이루어진다는 속설이 있을 만큼 축원하는 나무로 각광받고 있으며 현대를 살면서도 토속적 민속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연리목은 부부목, 각시나무, 서방나무, 음목, 양목이라고도 하는데, 연리목 아래에서 촛불을 켜고 빌면 아들을 낳는다든가, 부부가 싸움을 했거나 사이가 좋지 않을 때 연리목을 돌면 화해하게 된다든가, 연리목의 나뭇잎을 따다가 달여 먹으면 얼굴이 예뻐진다든가 화냥기가 있는 딸을 연리목 밑동에 난 빈 구멍에 넣어 두면 화냥기가 없어진다는 등 연리목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전해져오고 있으며 중국의 시인 백거이도 <장한가>에서 ‘하늘에 태어나려면 비익조로, 땅에 태어나려면 연리지가 될 것’을 읊기도 했다.
홍천군에서 가장 유명한 연리목은 남면 유치리 육군 제6161부대 안에 있는 소나무 연리목이다.
옥수암(玉水庵)이 자리한 골짜기는 원래 옥샘골인데 옥수암이 있다하여 옥수암골로 불린다. 골안으로 들어가면 금광굴이 있다.
연리목을 보고 돌아서면 계곡 안쪽 둔덕에 옥수암이 보인다.
옥수암(玉水庵)에 대한 기록은 원효대사가 일월사를 창건하면서 옥수암도 지었다는 기록이 구전으로 내려오고 있고 신라 성덕왕 7년에 진표율사가 창건했다는 기록이 있다.
한때 옥수암은 백일기도도량으로 신자들이 찾기도 했다. 옥수암 뒤의 바위벽은 백일기도를 드리며 밝힌 촛불이 가득했고 바위사이에서 나오는 약수는 정한수로 올리기도 했다.
최근에는 스님이 옥수암으로 거처를 옮기고 기도를 드리고 있다.
옥수암을 품고 있는 산이 우봉(牛峰)이다. 옥수암골에서 우봉으로 오르는 길은 없지만 산이 험하지 않아 등강을 따라 올라가면 생태숲길 데크가 나온다.
옥수암에서 내려와 동굴약수를 찾아 동막골로 들어섰다. 골 어귀에 폐가가 있다. 수타사에는 암자가 둘이 딸려있다고 했는데 하나는 옥수암이고 다른 하나는 운수암(雲水庵: 조선조 숙종14년 1688년 상봉대사가 세웠다). 이 폐가가 있는 자리가 아니었을까 추정된다.
동막골로 오르는 이 길은 약수봉으로 오르는 등산로이면서 와동에서 수타사로 넘던 고갯길이었다. 지금은 와동고개로 명기되어 있지만 원래는 동막고개다. 고갯마루에서 약수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은 무쇠말등이며 동굴약수는 동막고개(와동고개)로 오르는 산 중턱에 있다. 이정표가 있어 찾기에 어렵지 않았다. 전설이 서린 동굴약수라 맘이 설레었으나 관리가 되지 않아 찾는 이들이 많지는 않은 듯 했다.
공작교를 건너 수타사로 들어섰다. 봉황문 앞에서 합장을 하고 고개를 드니 봉황문 홍회루 그리고 대적광전이 일직선으로 한눈에 들어온다.
수타사에는 일주문이 없다. 사찰에는 보통 3개의 문이 있는데, 첫번째는 두 개의 기둥만으로 세워놓은 ‘일주문’이며, 두번째는 사천왕이 지키는 '천왕문', 세번째는 제석천이 지키는 ‘불이문’이다.
봉황문은 수타사의 ‘천왕문’의 역할을 한다. 천왕문은 사천왕상이 지키는 문이다. 사천왕이란 동,서,남,북의 네 방향에 지국천왕, 광목천왕, 증장천왕, 다문천왕이 각각 해당 방위를 담당하고, 사바세상의 사람들이 지내는 모습을 부처님께 보고하는 역할을 하는 신들이다. 또한 사찰을 수호하는 수호신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봉황문은 수타사의 정문이라고 할 수 있는 문이다. 이 문은 현종 15년(1674) 사승 법륜이 창건하였으며, 이 문 안에는 숙종 2년(1676) 사승 여담이 조성하여 봉안하였다. 나무와 흙으로 빚은 소조사천왕상은 강원도 유형문화재자료 제12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조형미가 뛰어난 작품이다.
입구 오른쪽에 칼을 들고 있는 동방의 지국천왕과 용이 여의주를 쥐고 있는 남방증장천왕, 왼쪽에는 악기의 일종인 비파를 들고 있는 북방다문천왕과 당을 쥐고 있는 서방광목천왕이 있다.
수타사는 우리 국문학상 매우 귀중한 책인 ‘월인석보(보물 745호)’ 두 권이 발견된 절로 더 유명하다. 1970년대에 새마을운동의 일환으로 봉황문안의 사천왕상중 동편의 지국천왕상을 수리하다가 그 복부에 소장된 책 두 권을 발견했다. 그 책이 세조 때에 지은 월인석보의 초간본인 17권과 18권으로 현재 수타사 보장각에 보관 전시되고 있다. 월인석보는 수양대군이 지어올린 ‘석보상절’에 세종이 찬한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을 합한 책이다.

빈 달이 넘치는 강을 비춥니다.
강물은 꼭 달의 원호 만큼만 넘쳐납니다.
그토록 세상을 떠돌았어도
나는 아무것도 담지 못합니다.
아래로 휘는 것도 단지 그리움 때문입니다.
올려다보면 그것은 목마름이기도 합니다.
하많은 세월을 흘러 흘러왔지만
여전히 외로운 나는, 그냥 외로움으로 굴러갑니다.
이 길의 끝은 어디일까요.
세상은 교교하고, 내 빈 가슴은 달빛으로 출렁입니다.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

마음속으로 읊조리며 봉황문을 지나 경내로 들어섰다. 왼편으로 단풍나무가 서 있고 그 옆에 은행나무가 떨어뜨린 은행알들이 눈처럼 싸여있다. 스님이 빗자루로 쓸어 모은다.
생이 다한 끝에 또 한 생이 시작되는 윤회의 삶. 함부로 밟지 마라.
글·사진 허 림(시인)
 

 

 

저작권자 © 홍천뉴스 / 홍천신문 홍천지역대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